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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근영샘 - 몸의 인지과학 1강 후기 (후반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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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4-08-09 18:21 조회3,757회 댓글2건

본문

 (앞의 후기에서 계속) 

  이러한 표상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발제주의(enact). 발제주의는 인지는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이미 완성된 마음의 표상이 아니라, 마음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림처럼 이미지가 떠올라서 표상화가 되어야만 앎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보어가 이중슬릿실험과 퀀텀점프(전자가 뿅뿅 이동하는 원리)를 말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중간단계의 경로를 구체적으로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면 그건 아는 게 아니라고 반박했다. 보어는 이것은 표상 너머를 보여주기 때문에 표상화 할 수 없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표상화되지 않는 앎, 표상을 버려야 얻는 앎이 아닐까? )

 

3. 반성적 사고와 지관의 앎

  우리는 내가 마음에 대해 안다’, 혹은 마음을 인식한다라고 한다. 앎은 언제나 ‘~~에 대해 안다라는 반성적 사고를 한다.(여기서 반성이란 잘못했다가 아니다^^) 바렐라는 안다는 것에 반성적 사고 대신 지관의 방식을 도입한다. 지관(止觀)이란 영어로 mindful awareness이다. 주의를 집중하는 attension이 아니다. 마음 가득한 깨달음이다. 내가 운동에 대해 알지만 사유가 운동하는 것은 모른다. 내가 자전거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앎과 행위가 분리되어 있다. 몰라서 못한다는 말은 반성적인 것이다. 마음을 알고 나서 마음을 갖게 되는 게 아니다. 마음을 경험하고 체화해야 한다. 반성적 방식으로는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에셔의 그림을 보면 미술관에서 관찰하는 세계가 내가 존재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둘을 분리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발제적이다. 발제주의는 나와 세계의 거리를 두어서는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렐라는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봄(지관)으로써 마음을 보는게 자각이라고 했다. 체험이 자각이다. 대상을 관찰하는 게 자각이 아니다. 체험을 해야 내 마음을 알게 된다. 철학과 수행이 따로 있지 않다. 수행과 마음이 같이 갈 수 밖에 없어서 체화된 인지라고 한다.

  고양이 실험을 해 보면 능동적인 체험과 인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고양이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서 깜깜한 곳에 두고 장애물을 놓는다. 한 집단은 풀어놓고 다른 집단은 수레에 태운다. 풀어놓은 고양이는 장애물과 만나 부딪히면서 피해 다니는 걸 알게 되지만 수레에 탄 고양이는 끝까지 장애물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지란 체험이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 자체가 운동을 하는 거다. 뉴런의 거울신경은 운동을 해야 인지를 한다. 남이 운동하는 것을 보기만해도 운동뉴런이 움직인다. 우리는 경험을 함으로써 앎을 구성해 나간다.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자아의 비통일성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동을 보면서 자아가 있는가를 본 것이 오온(五蘊)이다. 오온은 색, , , , (色受想行識)이다. 색은 형체다. 수는 느낌인데 계속 변한다. 상은 분별하는 것이다. 좋다 싫다도 매번 바뀐다. 행은 습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식에도 자아가 없다. 감각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모두 서로 다른 경험으로 감각적 대상을 만든다.

  오른쪽 귀는 음성을 구분하지만 왼쪽 귀는 연속된 소리가 침투하는 음악을 듣는데 탁월하다. 남자는 3~5개로 음을 변별해서 듣지만 여자는 5~7개로 음을 변별해서 듣는다. 그래서 여자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라고 얘기하면 남자는 그런 식이 무엇인지를 못 알아 듣는다. 남자는 음성변별이 약하고 시각변별이 강하다. 사람마다 감각경험과 지각의 형태가 다르다.

 

4. 자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책 130쪽의 그림이 자아의 구성에 대해 잘 보여준다. 첫째 그림은 경험의 찰나성이다. 매번 단편적인 불연속적 경험 밖에 없고 매번 마음이 달라진다. 두 번째 그림은 선험적 자아다. 이렇게 매번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원천적으로 있다. 이 누군가가 경험을 초월해서 있는 선험적 자아다. 그 자아가 우리의 경험을 만드는 실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를 찾아간다고 할 때의 나이다.

 세 번째 그림은 경험의 순간에 나타나는 지나온 시간의 자아. 1,2,3,4,5.....의 경험을 할 때 5의 경험을 하는 나는 1~4까지의 경험을 품고 있다. 5의 경험이 배타적(exclusive)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서로가 흘러 들어서 음악처럼 섞여서 존재한다. 자극은 메아리로 남아서 다른 자극이 왔을 때 침투해 들어간다. 5를 경험할 때 1~4까지의 경험이 말려들어가는 것이 업을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기억은 배타적이 아니며 상호침투적이다. 박음질처럼 엉켜드니 경험했던 것을 안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결과이며 효과다. 우리는 선험적 자아가 있어서 괴롭다고 착각한다. 어떤 선험적 자아가 있어서 1,2,3.... 경험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반대되는 방식으로 간다. 선험적 자아 때문에 1,2,3..... 이 끊긴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전도가 망상을 만든다.

만약 반대로 1~4까지 말려드는 것이 원인이 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뒤의 것들을 새롭게 정렬한다. 4를 경험함으로써 1,2,3이 되는 듯이 배열이 바뀐다. 내러티브가 재구성되면서 원래의 나로 간다. 자아가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러면 정신병원 가야한다) ‘과거 경험이 말려 들어가서 형성된 자아가 원인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AB를 때리면 인과가 생긴다. A에게는 B를 때렸다는 업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B가 그것을 업으로 받지 않으면 A는 업이 안 생긴다. 자비란 제도나 교화가 아니다. 업을 받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구원하는 것이다. 내가 받지 않으면 상대가 업을 안 짓는다. 이것이 대승적 입장이며 업의 메카니즘이다.

 

5. 자가조직화(autopoiesis)의 원리 - 공명, 상호성, 분산화

생명의 기본윤리는 자가조직적이다. 뇌는 어떻게 스스로를 자가조직화하는가. 외부로부터 A라는 자극이 들어와서 ()라는 뉴런과 ()라는 뉴런이 동시에 자극을 받는다면 ()() 사이가 공명한다. 같은 사건을 겪은 뉴런들이 접속하기 시작한다. ()가 다른 자극 B와 접속하면 반드시 ()도 자극 B에 접속하는 순환성의 관계가 된다. 하나만 건드려도 ()()()....등 공명하는 뉴런들이 늘어난다. 접속은 상호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물망은 점점 넓어진다. 뇌는 마음을 표현한다. (=마음은 아니지만) 추상적인 개념일수록 그물망이 더 많이 확대된다. 훌륭한 개념일수록 더 분산적이고 더 넓은 공명을 일으킨다.

뉴런은 외부자극보다 내부에서 받는 자극이 더 크다. 외부에서 눈으로 들어오는 자극의 20%가 시각피질로 간다. (164쪽 그림) 우리가 눈으로 본다는 것은 20%만 의식적인 것이다. 나머지 80%는 내부로부터 온다. 측슬상핵은 상구, 시상, 중뇌망상체 등의 내부망을 종합하는 곳이다. 외부자극 20%와 측슬상핵의 정보 80%가 시각피질로 간다. 만약 상구가 발달하면 운동성을 본다. 운동하는 물체는 사진 찍기가 어렵다. 우리도 운동성을 표상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개구리는 운동하는 물체만 보인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만 잡아먹는다. 간단히 요약하면 자기조직화의 원리는 공명, 상호성, 분산화로 이루어진다.

다시 에셔의 그림을 보면 위쪽의 손이 아래쪽 손을 그리고 있다. 내가 산출한 것이 다시 자신을 구성한다. 내가 그리는 방식은 반드시 커플을 이룬다. 최소단위의 구성이 두 개다.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상호성이 순환계를 이룬다. 뉴런처럼 우리도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살리는 작업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상호성의 원칙은 작용-피작용, 혹은 능동-수동이 아니라 같이 활발발해지거나 같이 다운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여러 계가 중첩된 상태로 구성된다. (소화계, 순환계, 내분비계....) 이들 각각을 요소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들 계가 집합하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이 나온다. 이것을 창발이라고 한다. 수소와 산소가 합해져서 물이 되는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창발이다.

자가조직을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수많은 원칙과 규칙, 조직들이 복잡하고 미세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떠올린다. 선험적 자아, ,

댓글목록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이크~~ 이제 보니 후기가 올라가다 끊어졌네요. 마무리 부분 올립니다.
( 선험적 자아, 신, 설계도가 복잡하게 연상된다. 그러나 자가조직화는 매우 간단하다. 마치 수많은 정어리떼가 몰려다니다가 상어가 나타나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처럼 단순하다. 정어리떼는 어떻게 완전히 흩어져버리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는가. 바로 옆의 이웃만 쳐다보면 된다. 이웃과 일정한 거리와 속도를 유지하며, 이웃의 거동을 따라 방향을 이동하면 된다. 끝.)

천천히님의 댓글

천천히 작성일

근영쌤의 명쾌한 강의를 다시 듣는 것 같습니다!!
후기 너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