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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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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단주 작성일14-10-28 01:12 조회2,5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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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3학기 3주차 수 약선생님의 <자기배려의 인문학>이었다. 10월의 어느 멋진 목요일, 오전 인문학 수업부터 오후 의역학 수업까지 약선생의 강의로 이어졌다. 즉, 약선생 데이였다. 약선생께서는 오랜만에 목감에 들어오니 향기가 난다며 일단 달콤한 약부터 뿌려주신 다음 강의를 시작하셨다.


소년의 미소를 가졌지만 그의 강의는 열정적이었다. 교재를 읽고 설명을 하시는 동안 그의 아름다웠던 공부의 역사가 가슴에 와 닿아 물결처럼 퍼져갔다. 앞서 걸어간 선배의 저서를 같이 읽는 느낌은 이러한가? 나의 몸에 독소처럼 퍼진 게으름에의 유혹이 경멸스럽다.


이 책의 주제는 자기 배려이다. 푸코를 중심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소크라테스로부터 플라톤, 에피쿠로스, 세네카, 키케로까지 함께한 자기배려의 담론을 같이 읽었다. 그리고 루쉰의 저항과 적막, 소세키의 자기본위까지도 자기배려와 연결하여 읽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금언은 원래 델포이의 신전에 쓰인 문구였다. ‘자신이 알려는 것을 신중히 질문하라’ 곧, 자기 자신에게 마음 쓰기이다.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죽음의 수련’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것은 자신을 해방시키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죽음의 수련’을 통해 우리는 늘 에로스적 존재가 된다.


밥과 공부와 우정의 장에서 약선생님의 우정에 대한 강의는 귀에 쏙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우정이란 어떠한 난관을 대신 돌파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아포리아 앞에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정은 유용성에 대한 의존성을 뚫고 진정한 타자, 자기와 만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우정은 ‘자기 자신과 친구 되기’이다. 이 또한 자기배려의 차원이며 ‘해방된 자기’이다. 니체의 말이 가슴에 꽂힌다.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벗을 사귈 수 없다.”


약선생께서는 수유너머에서 시작하여 감이당까지 7년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혼자서는 못해냈을 거라고 같이 공부한 도반들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노라고 강조하셨다. 도반들과의 세미나가 있었기에 글을 쓸 수 있어노라고...... 고대 서양의 철학자를 비롯하여 푸코와 루쉰과 소세키까지 그들을 향한 약선생의 애정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의 등 뒤는 늘 적막한 황야다. 하지만 손과 손으로 이어지는 체온과 텍스트로 접속하는 현자들과 그리고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선배들이 계시기에 돌아서 홀로 저 적막한 황야를 마주하더라도 두렵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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