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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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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몽이맘 작성일14-07-01 20:53 조회2,4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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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에세이

수요지성 2조 김 경숙

                                                        '계몽의 시대를 통해서 본 앎

   

I.서론

  , , , 그리고 대학까지 학교생활 내내 우리나라를 규정하는 단어는 개발도상국이었다. 이는 국민을 계도하고 산업을 발전시켜 유럽/미국과 같은 선진국가로 도약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 속에 있음을 의미했다. 또 우리 스스로는 선진 국민들보다 열등하다는 자의식을 키워, 소위 영어권 백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영어가 우리의 배움의 장에 들어온 이래 작은 시골마을까지 갖가지의 영어학원이 숲을 이루고 있다. 동네 요지의 건물마다 서너 개의 학원이 다양한 광고로 부모들의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쓴다. 영미권의 유명 도시의 학교나 값비싼 영어 캠프 클래스엔 우리 아이들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의 이 지독한 교육열은 배움에 대한 열정일까? 아니면 부에 대한 욕망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고 미숙 선생님의 근대성 3부작 중 계몽의 시대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II.본론

  1.근대 계몽기란.

  근대 계몽기에 대한 연대적 분류로,

             이 땅에 근대성이 정초된 기원의 장으로 1894(갑오동학혁명/갑오개혁)에서 1910(한일병합)까지

                이르는 말이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 7)

라고 말한다. 근대 이전 18세기의 두 지성 연암 박 지원과 다산 정 약용을 지난 학기 공부하였다. 그 시대를 아우르는 지성이라 하더라도, 근대 이전의 지식사회는 면면히 내려오던 고전학문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학문의 근간은 한자로 된 한문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비록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로 한글이 사용되었어도, 언문이라 하여 아녀자의 잡문 내지는 일상 언어의 영역이었다. 입신양명의 길인 과거시험이나 사대부의 학문탐구는 당연히 고전이었기에, 소수의 사대부 계층에게만 앎의 장이 국한되었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으로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박 영호, 김 옥균 등의 젊은 지식계층의 사회개혁과 각성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매일/독립신문의 간행과 한글보급에도 힘쓰게 되었다. 또한 계몽개혁에 대한 사회적 욕구에 맞춰, 서구 기독교의 전교는 학교와 병원건립을 통해 일반 민중의 삶 속에 들어왔다. 더 이상 지식의 앎이 사대부라는 특정계급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 농민 등 전 민중으로 대중적 확산을 하게 된 것이다.

        누구든 배울 수 있다는 자유의 속내에는 누구든 배워야 한다는 강제와 구속의 메커니즘 이 작동하고 있었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 197)

이러한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신문이나 글을 통해 끊임없이 신랄하게 한문을 폄하하고, 선진지식과 부국강병만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소명임을 주지시켰다. 선진화와 부국에 대한 무한한 갈망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60/70년대 산업화의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소명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초//고등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가 된 것이다. 이 땅의 국민이 되는 조건에 배움이 필수가 된 것이다. 덕분에 전 세계에 어느 나라도 이루기 힘든 문맹률 0%의 대 기록을 자랑하며, IT산업 1, 자동차생산 6위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2.근대 계몽기 이후 근간이 된 앎의 특징.


          중세의 학문은 천리, 즉 우주,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 로 사유하는,

            혹은 인간과 자연을 연속적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인식론이 자리 잡고 있다.” (고미숙, 계몽 의 시대, 197)

  중세 농경사회에서는 앎은 자연의 순리를 아는 것이며, 이는 곧 자신의 삶의 이치를 아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근대적인 앎은,

         자연은 그것을 세계라 부르건 우주라 부르건 오직 분석하고 측량하고, 그 다음엔 지배하고 착취해야 할 대상으로 전이

           되었 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 204)

 즉 앎은 실용이라는 외연을 만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이 된 것이다. 일본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함께 들어온 서구의 산업과 자본주의는, 지식의 습득과 축적은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이라는 동의를 낳았다. 이는 곧 앎은 측정 가능한 정보이며, 부로 가치 전환될 수 있음을 말한다. 대중매체가 미비했던 지난 세기에는 사회적 도약을 보장할 수 있는 고급 지식은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좋은, 더 높은 단계의 지식을 위해 놀라운 교육열을 발전시켜 왔다. 여기에 자본이 만나 막대한 부를 창조할 수 있는 교육사업의 드넓은 시장이 만들어졌다. 학교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보습학원, 입시학원이 모든 요지의 건물들을 점유하고, 2011년 기준 전문대학을 포함한 대학교의 수는 347개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우습게도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내 수도권 지역에 그 3분의 1112개의 대학이 난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기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총인구는 50,424천명, 0세부터 24세 이전 공적 배움의 실질적 대상 인구는 총인구의 39%를 차지하고 있다. 교육비는 2013년 이 데일리 신문에 실린 현대경제연구소 조사를 보면, 30-40대 가구의 총수입은 월 460만원이며, 교육비는 월 52만 원 정도라 한다. 이와 같은 높은 경제적 부담에 비해,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문해율(문서해석능력)OECD 가입국 23개 국 중 19(201437일 국민일보 참조)로 최하위국이라는 사실이다. 문맹률 0%, 세계 청소년 수학/과학 경시대회에서 2,3위의 상위권인 우리가 문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최하위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배움이 자본과 만나 교육 사업이 됨으로서, 모든 앎이 실용이라는 외연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정보로서의 앎, 삶의 현장에서 바로 적용 가능한 앎, 돈으로 환원 가능한 앎으로 우리가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온갖 자격증이 난무하고, 대학에서는 잡다한 정보들이 커리큘럼 속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철학/문학 등 고전적 인문학은 전공자 부족으로 학생보다 전공교수의 수가 더 많은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더 이상 학문이 우주나 자연을 만나지 않으며, 누구도 우리 인간 존재의 사유를 우주와 자연과 함께 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21세기 현장 속에서의 앎.

 

  우리는 참 희한한 세상과 만나고 있다. 지구 저 반대편 어느 곳이든 하루 이틀이면 닿을 수 있고, 미국 촌구석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도 작은 핸드폰으로 생생히 볼 수도 있다. 감히 상상도 못하던 정부 기관의 통제된 정보도 누군간 손쉽게 접근해 돈으로 환원시키기도 한다. 또한 세계 여러 기업들은 자신들만의 기술/기업 정보의 보안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다. 모든 정보 지식은 자본으로 환원 가능하고, 또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정보 지식을 얻기 위해 교육현장 속에 직접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근대 계몽기 이상인 지식의 대중화가 실현된 세상을 21세기 우리는 살고 있다. 공적 교육이 모든 배움의 제공처가 아니며, 필요한 지식정보를 학교에 가지 않고도, 그 배움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왜 계속 배움에 조급해 하는가. 앎의 현장이 바뀌었는데도, 우리는 왜 여전히 높은 교육열로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있는가. 이는 근대 이후 우리에게 뿌리내려진, 앎의 정도는 곧 자본과 연결되며, 그 자본은 사회적 계급을 대변하는, 그런 앎의 인식론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수많은 지식정보의 홍수 속에서, 누가 적재적소에 필요한 앎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가능한가가 중요해졌다. 누구에게나 열린 앎의 현장에서의 선별기준은 당연히 공신력 있는 증명서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온갖 영역에서 자격증이 범람하고, 누구나 공감하는 스펙 쌓기가 앎의 욕구를 부채질하고, 그에 맞춰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본의 블랙홀 속으로 모두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은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2014년 청년 실업률은 10.9%를 기록했으며, 실제 취업을 포기한 사람을 포함한 체감실업률은 22.1%(2014년 기준 통계청 자료)로 조사되었다. 이는 곧 학교가 더 이상 미래의 보장된 자산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취업에 걸림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심리적으로나 실제 현장에서. 즉 육체노동이 강한 업종이나 중 소 기업들은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반면에, 몇몇 대기업의 신입사원 채용시험은 몇 백 대 일이라는 경이적인 기록들을 갱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 도서관을 가본 적이 있는가? 거의 모든 도서관 열람실은 취업준비 청년 백수들의 독서실로 변한 지 오래고, 계절도 시간도 멈춘 듯 모두들 공부, 공부, 공부만 한다. 일상의 삶이 배제된 채 무한 반복되는 우리의 앎의 형태는 분명 변화되어야만 한다. 지난 세기의 앎의 외연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기존 교육의 현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앎의 형태를 추구하고자 하는 다양한 욕망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

 

III.결론

 

  앎이 실용적 가치에 갇혀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고, 그 영역을 좁혀가는 동안, 일선 학교는 그 역할에 혼란을 겪고 있다. 대학에서의 순수 학문은 붕괴하고, 취업률에 의해서 학과의 존폐가 가늠되는 현실이다.

이에 대한 해결들을 사회 여러 인사들이 다방면으로 모색하고, 그 답을 내고 있다. 중앙대 이사장 이며 산업현장의 CEO 인 박 용성 회장은 조선일보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학도나 경영학도에게도 복수 전공의 문을 넓혀 인문학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박용성, 조선일보, 2014.6.30.)

이는 대학에서 각 분과와의 경계를 허물고, 공학도든 인문학도든 사유의 폭을 넓혀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를 미국 대학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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