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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6주차 수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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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보리 작성일24-03-25 21:19 조회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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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5,000의 역사>

 

  세 번째 강의에서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점이 

측정할 수 없는 생명 값피의 부채라는 개념이었습니다

피의 부채라니, 표현만으로는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실 화폐의 기원은 목숨값에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화폐는 측정할 수 없는 생명 값을 측정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거지요

그것은 그 당시의 가장 큰 부채가 목숨값이었기 때문이라니 목숨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화폐는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령 살인사건이 일어나 한쪽이 죽게 되면, 마을의 수장이 나서서 중재를 하게 되는데

당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을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단위로써 보상하게 했다고 하네요

그러면 상대 쪽에서는 그것을 받을지 말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벌어지는데

그런 과정은 생명이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있는 장치로

생명의 가치를 화폐로써 측정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피의 부채라는 개념인데요

생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지만 어쩌다 생명을 빚지게 됐다면 

그나마 생명은 생명으로 갚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집으로 들어가 죽은 자의 의무와 역할을 대신했다고 하는 걸 보면 

표면적으로는 생명 값의 일부를 물건으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라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이미 생겨난 불화를 끝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취했던 것일 뿐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이해하는 부채와는 그 의미가 아주 달랐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신용이 발달한 사회의 경우, 

딸을 신용의 증표로 삼아 돈과 물건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고대 경제에서 발견되는 이런 여성의 교환같은 것을 막으려고 화폐가 출현했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볼모를 세울 때, 왜 하필 딸이었을까요?

 

  이 대목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엔 참 신박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뭔가로 신용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뭘로 증명하지?’ 라고 했을 때

딸은 그걸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딸은 젊은 여자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에, 채무를 진 한 사람의 목숨값보다 

더한 채무상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진 겁니다.

 

측정 불가능한 생명 값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생명과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최초의 신용보증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딸을 담보로 내돌리다니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서로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딸이 돌아다닌다고 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을 통해

마치 증여의 사이클을 물건이 계속해서 돌다 보면 어느 순간 증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딸이 마을 안을 도는 사이에 증식의 현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딸의 입장에서도 아버지와 가족이 두 배로 늘어난 것과 같은 의미였다고 하니

그렇게 보면 구석기 호모사피엔스의 출현 이후 인류는 끊임없이, 세대를 거듭하며 

증식의 과정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탐구해 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에서도 증식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지요.

 

  마르셀 모스는 증여의 관행을 움직이는 원리는 증여의 원리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지만 

사실 증여의 원리는 교환의 원리, 순수증여의 원리와 양쪽에서 접촉하면서 하나의 전체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동하는 움직임인 순수증여를 하는 힘은 우리가 그 힘의 개입을 허용하는 순간

느닷없이 증여의 사이클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순간 사라지면서 

사람들에게 뭔가 풍요로운 것의 증식이 일어났다고 느끼게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특별한 순간에만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실체로서 파악할 수는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증식이라는 문제를 깊이 탐구했던 구석기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풍요로움의 흔적으로써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하지요.

 

  증여의 사회였던 구석기 시대의 호모사피엔스들은 동굴벽화를 남겼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라스코동굴벽화로 거기에는 증식이라는 주제와 죽음이라는 주제가 함께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증여의 힘과 만났던 경험이 그들에게

생명의 증식은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일어났다가도 그 힘의 방향이 바뀌면 소멸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고

그 결과 증식순수증여의 힘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위해 

그들은 동굴에서 그런 것들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했으며 그 결과물을 벽화로 남겼다고 하니

와우! 그동안 제가 막연하게 품고 있었던 

구석기 호모사피엔스들에 대한 편견(그들은 문자도 없고 미개해서 그저 수렵, 채취하는 생활만으로 일관했을 거라는)이 

여지없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증여의 사이클이 순환하면서 

사회에 유동을 발생시켜 사회 전체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인 각자도 그 사이클 일부분의 움직임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고 

그래서 신속한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의무감을 가지고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증여는 우주마저 움직이게 한다는 표현까지 있었다니, 그들의 넓은 시야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런 시절이 지나면서 왕과 국가, 금속화폐가 생겨나는데요

이런 변화는 우리 인류의 마음 구조가 변화한 데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부와 권력의 원천이 자연에있지 인간에게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서 

그 원천들을 인간사회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무렵부터는 부의 원천을 인간사회로 끌고 들어와 금속화폐를 만들고 

권력의 원천을 끌고 들어와 왕과 국가가 생겨났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런 변화로부터 생겨난 시대상들은 이후의 역사기록을 통해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여기 코르누코피아라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무궁무진하게 부를 산출하는 신비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3만 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가 증식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각 시대에 부합하는 다양한 이미지의 형태를 띠고 계속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부와 권력의 근원을 인간사회로 끌고 들어온 이후

인간사회 자체적인 힘만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부를 산출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과 함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 코르누코피아의 이미지를 정신화된 부의 상징으로 변화시키면서 자본주의의 길을 열었고

이런 비 물질화의 과정에서 화폐는 물질성을 벗어나 순수한 기표로 나아갔으며

그 결과로 우리는 가상 공간에서의 경제활동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비 물질화의 길로 나아간 자본주의는 증식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 왔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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