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 1학기 7주차 발제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제6장~종장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수성.png

수성 1학기 7주차 발제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제6장~종장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도경 작성일24-03-26 21:57 조회38회 댓글0건

본문

 

수성 1학기 7주차 발제 /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제6장~종장 / 한도경

 


자연과 사랑을 주고받는 경제


 

근대사회의 가치증식이란?

인간을 인간으로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를 인간적인 자세로서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은 오로지 사랑하고만, 신뢰는 오로지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다. … 네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너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그에 화답하는 사랑을 탄생시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에 의해 너 자신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 <1884년 경제학 철학 초고> 화폐, 마르크스 -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서, 오히려 자신이 사랑받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증여로서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본래,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생물인데, 화폐의 침입에 의해, 인간관계가 증여가 아닌 교환관계로 전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화폐의 부정적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힘뿐이라고 합니다.

농업사회에서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대지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됩니다. 농민은 대지에 사랑을 퍼붓고, 대지는 그 사랑에 화답하여 풍요로운 부를 증여해주는 ‘창조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반면에, 근대산업사회에서의 노동은 개인의 생존 수단일 뿐입니다. 인간은 활동하는 모든 환경에 대해 어떠한 친밀감도 느낄 수 없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노동의 과정에 분리, 단절, 비인격화와 같은 부정적인 원리가 개입되어 ‘소외’가 발생하는 ‘교환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가치증식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대리표상이라는 트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의 증식은 마치 ‘마술을 부리듯이’ 일어납니다. 화폐 그 자체로부터는 자연이 행하는 ‘무상증여’와 같은 가치증식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유의 창조’를 재미있게 연기해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자연의 무상증여에 의존하지 않고 ‘순생산’을 창출해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교묘하게 짜여진 약간의 ‘마술’이 필요합니다. 화폐에 의해 가치가 표현되는 ‘상품’이 가진 특성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임금의 형식으로 돈을 지불하고 ‘노동력’이라는 특별한 상품을 사버립니다.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교환가치’란 하루의 노동으로 피곤해진 노동력을 이튿날에는 회복시켜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재생산을 위한 유지비용, 의식주와 같은 노동력의 유지비용을 말합니다. 반면에 ‘사용가치’란 자본가가 준비해둔 기계설비를 사용해서 노동자가 매일같이 행하는 노동력의 지출을 말합니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보다 크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산출합니다. 또한, 교환가치는 물가나 경기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사용가치는 정체파악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그러한 ‘트릭’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에 의해 ‘대리표상’을 해도, 교환의 원칙을 어기지 않고서도 합법적으로 가치의 증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즉,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어긋남, 낙차를 통해 잉여가치의 증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에 너무 많은 이윤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자본가는 자신들의 잉여가치 증식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자신도 사회에 생산수단이라는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감시와 감독이라는 노동을 하고 있다고 변명합니다.

자본주의 분열, 물질과 영혼

잉여가치(증식)가 발생하는 모든 경우에서 인간은 기쁨(열락)을 느낍니다.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증식은 뭐든지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연을 자원, 조작의 대상으로 취급하며, 노동 역시 시간으로 환산합니다. 순수증여를 하는 자연의 능력에 부정성을 작용시키고, 분리를 전제로 해서 증식이 일어나지만 이것 역시 틀림없는 열락입니다. 이러한 열락을 ‘팔루스의 열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교환의 원리를 통해 사회 전체를 자신의 열락의 대상으로 삼고 증식=열락을 행합니다.

<자본론>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팔루스의 열락’을 추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를 구상했는데, ‘팔루스의 열락’이 철저해진 사회 이후에 우리가 ‘타자(여성)의 열락’이라고 부른 형태의 사회 출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시작한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운동을 끝까지 밀고나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회주의’,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비전의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팔루스의 열락’이 압도적인 지배권을 장악해버려, 도구주의적 사고가 만연하고, 자연과의 사랑으로 가득찬 관계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증여의 원리는 자본주의 이후에 나타나게 될 대안적인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원리이며, 증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사회 형태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해 해체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도 만년에는 증여의 원리를 수용한 고도의 산업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수증여와 증여’의 원리가 접촉하면, 영혼(영력)을 포함한 ‘순생산’이 발생합니다. 산업의 형태로는 농업이, 표현의 형태로는 예술이 그 예시입니다. 그런데, ‘순수증여와 교환’의 원리가 접촉하면, ‘자본의 증식’이 발생합니다. 이때의 증식은 순생산과는 달리, ‘영혼’을 자극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제’시킵니다. 즉, 자본의 증식은 ‘물질’의 풍요는 가져와도, ‘영혼’의 풍요는 가져올 수 없습니다. 풍요로워지기 위해 실현시킨 경제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꿈의 열쇠, 커뮤니케이션

순생산과 자본이라는 증식의 두 형태를 하나로 결합시킬 수는 없을까요? 즉, ‘팔루스의 열락’과 ‘타자(여성)의 열락’은 양립될 수 없을까요? 그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꿈’일 것입니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서 이러한 꿈의 일부를 변형된 형태로 실현시킨 풍습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꿈속에 억압된 증여의 욕망이 크리스마스라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꿈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기 십상인 물질적 풍요가 아닌, 창조에 기여하는 영혼의 풍요로부터 발생하는 ‘행복감’을 실현하는 꿈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그 열쇠는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적절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기 위한 세계로부터의 부름이나 질문에 올바른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오면, 거기에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열립니다.

그 질문의 대상 중의 하나가 바로 ‘자연’입니다. ‘자연’은 자신에게 내장되어 있는 힘과 형태에 대한 지성을 토대로 해서, 외부로부터 도움받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어에는 ‘gibt’라는 단어가 ‘존재=있다’라는 의미와 함께 ‘선물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 present가 현재와 선물이라는 두가지 뜻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주로 과학이 자연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나, 과학은 증여가 아닌 교환의 원리에 의해 부적절한 방식으로 질문합니다. 과학=근대기술=‘테크네’는 순수증여의 본질을 가진 존재인 자연=진리=‘포이에시스’를 억지로 끌어내려 합니다. 자연의 ‘자발적’인 과정에 ‘부정성’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로 인해 자연은 침묵합니다. 현대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황폐함 속에 내팽개쳐진 셈입니다.

우리는 현재 ‘경제’가 지배하는 시대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황폐’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행하는 행위로서의 경제현상을 교환의 원리가 아닌, 증여와 순수증여라는 다른 두 원리와 단단히 묶여 있는 ‘전체성’을 가진 운동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증여-교환-순수증여가 서로 연결된 상태를 회복시켜야만 합니다.

‘경제’의 어원인 그리스어 ‘오이코노모스’에는 ‘집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주인의 살림살이를 돕고 관리하는 주변인으로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연을 대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경제의 진정한 정신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