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숙샘 조, 3학기 에세이 후기입니다.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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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숙샘 조, 3학기 에세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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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짱숙 작성일15-10-01 14:02 조회2,5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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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9월 23일에 진행되었던 수요지성 3학기 에세이 후기 올립니다.
 
길진숙샘 조 후기입니다.

먼저, 박일호샘, 채영님샘, 임길례샘입니다.
전체적으로 제목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다. 뭘 쓰고 싶은지 모르겠다. 제목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소제목도 그 밑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박일호샘 : 들풀 
문단이 끊어져 있지 않다. 문단지킬것
개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말 저말 섞여있으나 그 말들에 대한 책임이 없다.
개체성, 단독자, 고독자.. 같은 의미인가?
주제를 못 찾았거나 주제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다. 다 써보겠다는.. 이는 문제의식이 없다는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쓰는 것이 에세이 아님.
루쉰과 니체를 함께 담기엔 너무 크다. 
루쉰은 어디에 절망했고 어떻게 반항했는지, 길손은 어디에 절망했고 반항했는지 구체적으로 써야한다. 노예의 삶에 반항한 것인가?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공부되는 것이 없다. 에세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채영님샘 :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냥 내용을 요약한 느낌이다. 뭘 말하고 싶었나? 전혀 해석이 안 들어간 줄거리일 뿐.
이반 일리치의 위기만 나열. 그런데 왜 위기라고 생각하는지도 나와있지 않다. 진짜 위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위기 인지 등..
제목이 ‘이반 일리치의 인간관계’인데,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었는지 내용이 없다. 본인의 해석이 필요하다. 아들과의 인간관계, 게라심과의 인간관계 등은 어땠는지.
평탄한 삶 언급했는데, 작자는 그것을 긍정하는가? 문제의식이 없다.
1페이지 ‘아들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했는데,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 아들만을 통해서인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저항했다는 느낌. 게라심에게 느낀 것에 대한 설명 필요.
마지막부분, 이반의 죽음에서 나를 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썼어야한다.

임길례샘 : 이반 일리치의 죽음
뭘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논점 없고, 주제도 없다. 문제의식 없음. 책임지고 글을 쓰지 않았다. 이 얘기 저 얘기로 옮겨간다. 뭘 얘기하는지 나오지 않음.
제목이 ‘이반 일리치의 삶’이라 했는 어떤 삶을 얘기하고 싶었나? 제목이 너무 크다. ‘삶’이라는 단어 안에는 여러 담론이 나올 수 있다. 어떤 삶인지 그 결을 정해야한다.
왜 거짓된 삶이라고 하는가? 얘기를 했으면 책임지고 전개해야 한다.
갑자기 우정으로 넘어간다. 결혼과 가정 얘기는 왜 또? 결혼과 가정 얘기를 쓸려면 아예 여성의 삶으로만 이야기를 풀어가야 했다. 가정 또는 의무적 관계, 직장..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에세이가 아니다. 이야기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소제목은 큰 제목 드러내기 위해 있어야 한다. 큰제목과 소제목이 연관이 없다. 소제목끼리도 연관이 없다.
논점이 없으면 산만해진다. 자신 없이 늘어만 놓았다.
문단은 하나의 의미 덩어리이다. 문단 구성 무시했다.

다음으로, 김보희샘, 김현숙샘, 이미영샘입니다.

김보희샘 : 지하생활자의 수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될 수 없는’이 아닌가? 왜 아무것도 될 수 없나? 세상에 반항하지만 방향을 정하지 못한 자.
텍스트를 다 이해되지 않음. 텍스트 장악하지 못했음. 그러니 글이 방향감이 없을 수 밖에.
의식은 무엇이고, 자의식은 무엇이며, 몽상은 무엇인지 설명되어야 한다.
왜 몽상하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몽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설교하고 싶은데 설교안되는 사람,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안되는 사람, 복수하고 싶은데 복수안되는 사람, 경계에 서있는 자를 몽상이라고 하나.

김현숙샘 : 이반 일리치의 죽음
제목인 ‘산다는 건, 죽는다는 건 다 그런거지요’인데 그러면 왜 사나?
책 읽고 글 썼지만, 아직도 품위가 삶에서 중요하고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는 것은 톨스토이가 보여준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없다. 톨스토이가 보여준 삶, 죽음 앞에 반성하고, 죽음으로 다시 사는 삶이다. ‘다 그런거지요’ 할 거면 왜 톨스토이를 쓰나? 그럴려면 다른 거로 써야한다. 책을 읽고 작가가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본인이 동의안 된 부분을 쓰는 대신 진짜 삶이란 무엇일까를 의심해야한다. 톨스토이가 질문한 것이 그것이다. 내 질문에만 몰입해서 글을 쓴다. 동의 안된 부분을 쓰는 것 보다 톨스토이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집중해야한다. 

이미영샘 : 이반 일리치의 죽음
‘기만’, 자기삶이 기만일지 아닐지가 질문인데.. 톨스토이의 질문은 기만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진짜 삶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이반의 삶이 기만인지 아닌지로만 몰고 간다.
분석에 초점 맞추지 말고, 내가 작품을 어떻게 읽었나가 중요하다.
무엇을 보고, 느꼈나, 내 시선이 필요하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내 시선이 필요, 어떻게 느꼈나가 필요.
기만과 연민을 정의하는 쪽으로만 가면 텍스트가 사라진다. 내가 작품을 어떻게 읽었나로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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