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4학기 1주차 후기요~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수성.png

수성4학기 1주차 후기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푸른나무1918 작성일15-10-21 06:21 조회2,297회 댓글0건

본문

수성 4학기 첫째주 후기/20151014/ 김봉선

 

1교시 글쓰기 강의.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고샘 강의

고샘이 1학기 때 강의 하시고 두 학기 건너뛰고 컴백하셨습니다. 컴백인사는 수성 생존자가 많다ㅎㅎㅎ

이번 학기 교재는 뒤죽박죽 섞어 놓았다고 하시면서 책의 내용을 아는 것이 공부가 아니라 사계절을 따라 가는 것이 공부다 던져 놓고 이번 중국 여행 이야기를 하셨어요. 여유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마지막에 여유롭게 현무라는 호수를 산책하고 비행기를 타기로 한 일정이 동행들과 어긋남으로 의도와 무관하게 급하게 비행기를 타야했고 비행기 타고 보니 비행기 연착이란 통보를 듣게 되고 남는 시간에 라면을 먹을려고 했고 순간에 다시 비행기를 급히 타야 하는 상황을 말씀 하시는데 이런 어긋남이 우리 삶의 크기를 넓히고 인생이 어긋나고 죽음과도 같다고 해석 하시네요. 저는 국내항공을 이용해야 하나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ㅠㅠ). 어째든 조르바도 이런 어긋남과 뜬금없음이 선장이 되었고 새로운 장을 열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조르바와 두목처럼 사건을 정면대결 하고 사유 할 수 있다면 여행을 갈 필요가 없지만 워낙에 우리 일상이 반복적인 일과 몸을 안 쓰는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여행이 필요하다고 하세요. 제도가 좋아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머무름과 떠남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고... 범생이 두목이 조르바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붓다 책을 가까이 두고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요. 두목은 텍스트에 재대로 집중했나 봐요. 제가 성경책을 읽었다고 예수와 같은 인물을 알아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책을 대충 읽는 습관을 벗어나려면 책속으로 제대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항상 집에 두고 온 기억과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빙빙 돌고 있을 때가 허다하네요. 조르바는 여자는 약한 존재여서 사랑하고 과부를 죽인 비겁한 마놀라카스도 원한 없이 용서합니다. 그것은 유연한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요. 유연한 신체는 소통을 할 수 있는 신체인데 여기에 반대편에 서 있는 마을 장로의 고백은 정착민의 숙명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다시 살라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장로의 우울한 고백은 생명의 원리에 반하는 삶의 결과이기도 하겠지요. 조르바는 교감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상생하고 생명의 차원을 가질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거라고 해요.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두목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지성이고 우정이며 절대 아무나 가능하지 않다고 해요. 우리는 소통하는 신체가 되기에는 많이 뻑뻑하긴 하죠 (--;;). 조르바는 교감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영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교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주교에게 한마디 해줄 때 보면 진짜 그런 것 같아요(^^). 그는 매 순간 자기 눈으로 관찰을 합니다. 타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부지런히 관찰하겠죠. 자기 눈으로 매 순간을 열심히 보았으니 우상에 휘둘리지 않는 강심장이 됐네요. 그러니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무시할 필요 없이 자기와 똑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대합니다. 그러니 소통을 잘할 수 있게 되고 완전 선순환 되는 구조...부처님은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만나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른 부처님에게는 부처님인데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원한을 살 수 있는 존재인 거죠, 우리가 부처님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부처님으로 타인을 만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르바는 가족, 조국, 신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을 봅니다. 그 타인은 소통할 수 사람으로 전제합니다. 같은 날 의역학 시간에 유식 30송을 강의해 주신 정화스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면 조르바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2교시 방제학

적적한 몸의 해결사, 오적산을 김지숙 샘 강의 해주셨습니다

오적산은 말 그대로 다섯 가지 적을 없애준다고 해서 오적산입니다. , 오적은 한적, 식적, 기적, 혈적, 담적을 말합니다. 오적산은 한기를 해소하고 체한 것을 풀어주고 기와 혈을 뚫고 담이 결린 것을 풀어줍니다. 오적산은 오한, 발열, 관절통, 두통, 콧물 등의 표한증에 오심, 복통 등 비위의 허한습증이 나타날 때 처방되는 해표온리제의 대표적인 방제입니다. 해표온리제는 표리쌍해제의 하나로 마황, 백지 등의 해표제와 건강 육계 등의 온리거한약을 배합 합니다.

병원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제 중에 하나라고 하니 우리가 발산 때문에 생기는 병보다 쌓아 두어서 걸리는 병이 더 많다는 이야기 같네요. 무엇을 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일단 하나을 덜어 내는게 생활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3교시 의역학 강의

정화스님이 강의 하셨고 커리큐럼에는 유식30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에 대한 것은 알기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을 보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컵이 있다고 해도 시간의 연속성을 무시하면 있음과 없음 밖에 없습니다. 즉 연속성을 추론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의 역사성은 생명의 역사에서 길지 않습니다. 우리 뇌에서는 신피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피질은 뇌의 겉을 감싸는 카드 여섯장 정도의 두께에 해당하는 뇌의 피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원시의 뇌(발생학적으로 오래된 뇌)는 우선 공간적 분별을 하고 그 다음은 감정, 느낌,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서 시간을 연속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물은 시간을 연속적으로 인식할 수 없어도 공간적 분별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연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오래 전 사건도 다시 되새길 수 있게 됩니다. 엄마 뱃속에서도 사유할 수 있습니다. 거울을 볼 때 만나는 것을 자기라고 하는 것에서 무엇이 나인가를 질문 할 수있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한 개의 세포에서 100조 개 세포로 늘어납니다. 42억년 전 시작한 생명의 역사에서 99.9%가 멸종 했습니다 그러나 세포의 입장에서 보면 한번도 멸종한 적이 없습니다. 형태는 멸종했지만 세포는 현재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물론 똑같이 유지된게 아니라 변하기는 했습니다. 동일성의 역사는 사라졌지만 상속에 역사는 현재진행형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아론은 불변하는 것이 실재성으로 아트만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이 한다는 거죠. 그래서 무아는 inter-being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포와 세포사이 세포와 환경 사이(?)라고 거칠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DNA가 생기는 과정에서 세포는 세포막으로 서로 독립합니다. 독립은 하되 홀로 자급자족은 안되기 때문에 에너지를 얻기 위해 계속 inter를 합니다. 어제까지 부부인데 오늘 이혼했다고 나가 살수 없죠. 집도 절도 없는데 말이죠. 방만 나눠 쓰는 거죠.

무상은 향상하는 거고 동일성이 반복이 아닙니다. 있음이 연속인데 있음에 대한 내용은 끊임없이 변해 갑니다. 앞에 있음과 없음이 연속 과정입니다. 이 있음과 없음을 정보 상태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완전히 있음과 완전히 없음이란 없는 거죠. 생명의 일기장에 계속 써내려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일기장에는 당연히 살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일기장이 좀 오래되긴 했어요. 25억년 전  쓰여진 일기장입니다.

우리 삶은 살아온 날들이 기억을 중심으로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이 완벽하게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에 질문에 정확히 실재다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마음상태를 바꾸는 수행을 한다면 신체 내부에 변화가 생기고 전두엽에서 분리되서 사건을 해석하는 스위치가 켜져 있기 때문에 바뀐 상태가 일반적이면 바뀐 상태가 오히려 원래 자기 모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스위치가 약해지면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자유자재로 변화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진다면 외부도 마음대로 바뀌어 집니다. 뇌나 마음의 변화가 형색을 보기 때문입니다. 눈을 만드는 것이 눈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정보가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세포가 정보를 나누는 과정은 몸속에서 세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함께 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예전과 달리 교집합으로 봤을 때 이 생명의 일기장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수정란에 완벽하게 역사의 정보가 들어있고 몸 안에 모든 곳에 동일한 정보가 들어 있는데 위치에 따라 꺼버리는 스위치가 다릅니다. 즉 표현형이 다릅니다. 외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내 몸의 역사로 만들어 집니다. 망막이 사물을 인지하고 뇌로 보내는 신호는 사진 같은 화면이 아니라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신호로 한가지 해석만을 보내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보냅니다. 거리, , 깊이, 울림 등 다양한 신호가 짧은 시간내에 순서대로 신호들을 뇌로 보내면 이미지가 만들어 집니다. 그 이미지는 신호를 바탕으로 한 심상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니 같은 시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똑같은 것을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각과 심상의 이미지가 같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해석이 조금씩 다르게 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자신의 일기장이 하는 역할입니다. 내부(내부의 기억정보)가 외부를 어떻게 보는지 정할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지켜보는 나를 상상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봄은 외부인 동시에 내부가 됩니다. 수행을 하면 내부의 인이 변화 합니다. 일상적인 익숙한 것에 규명규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 인연을 구성하는 세계상이 달라집니다.

유식 유물과 같은 말입니다. 물질보다 심이 중요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유식 그 자체가 온전하게 유물이 되고 유물이 온전히 유식이 됩니다.

전생이론은 내가 있어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 하지만 무아를 보면 본질적으로 그런 돌아다님은 없습니다. 자기존재는 inter입니다. inter는 안 보입니다. 세포막이 생기고 세포막에 구멍이 생겨 정보가 왔다갔다 하는데 세포막(나의 영토를 규명하는 틀)은 나이고 세포 안(내용) 은 계속 바뀌고 있는 거죠. 세포막을 중심으로 안을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트마라는 생각이 동일성이 유지 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즉 시간을 사유하면서도 나를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기억이 창고가 있습니다. 정보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각되고 내부로 들어가서 심상 이미지를 만들면 안다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 심상이미지는 감각되고 있는 것을 해석하는데 동원되고 정보는 다시 한번 재해석됩니다. 이때 심상이미지가 불교에서는 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내부에서 만들어진 상과 상대합니다. 의식은 내부에 만들어진 대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인간 전에는 심상만 보았습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심상이미지를 보고 있는 나에 대한 사유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 사유체계는 분별선을 형성합니다. 즉 의라는 것은 책과 컵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책이 되기 위해서는 분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옆에 있어야 책이 됩니다. 분별된 것은 서로 다름이 익혀지는 것이고 다른 것은 없어지고 책만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분별선이 만들어지면서 과거의 기억이 창고가 변화되어 나타납니다. 이 분별선이 유연함이 신체와 의식의 유연성이 아닐까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