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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4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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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늬 작성일16-03-11 17:43 조회2,93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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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주차 수업이 되었네요. 오티 때 멍 때리고 첫 주 기다리고 있으면 환불심같은 딴 마음은 달아날 거라던 시성 샘의 말에 웃던 생각이 납니다. 막상 수업이 시작되니 딴 맘 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점점 빠져듭니다.ㅎㅎ


1교시 의역학 입문 – 주역 기초(우응순 선생님)

重澤兌

二兌澤 : 兌上絶‘

-주역에서는 우리가 보통 ‘바꾸다’의 의미로 쓰는 兌를 ‘기뻐하다’(說)의 의미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또 澤은 농경 시대의 못으로 공유재산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해독표에서 태괘는 가정에서 소녀 즉 막내딸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괘상이 막내딸의 미소처럼 생긴 것도 같고요^^ 이 괘는 기쁨의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1) 괘사 : 兌, 亨, 利貞.(태는 형통하니, 올바름이 이롭다.)

-태의 시대는 보통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우샘께서 주역에서 중요한 것은 낌새(조짐)를 잘 파악하고 늘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통할 때 조심해야 올바름이 이로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효사

初九, 和兌, 吉.(초구는 조화하면서 기뻐함이니, 길하다.)

九二, 孚兌, 吉, 悔亡.(구이는 믿어 기뻐함이니, 길하고, 후회가 없다.)

-주역에서 孚는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信이 말로 약속한 것을 믿는 것, 즉 믿음직함이 외면에 드러날 때 쓰는 말인 것과는 달리 孚는 믿을만한 품성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 즉 내면의 믿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孚의 상형을 자세히 보면 위의 부분은 새의 발톱, 아랫부분은 아들 즉 알을 뜻합니다. 새가 알을 굴리며 부화를 기다리는 것은 그 알 속에서 새가 나올거라는 마음 속의 믿음이 없이는 불가한 것이겠지요. 구이의 경우, 기뻐하는 상태이긴 하지만 바로 위의 효가 육삼, 즉 음이므로 잘 지켜야 후회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九三, 來兌, 凶.(육삼은 와서 기뻐함이니, 흉하다.)

九四, 商兌未寧, 介疾有喜.(구사는 기뻐함을 헤아려 편안하지 못하니, 지조를 지켜 악을 미워하면 기쁜 일이 있다.)

-商은 여기서 ‘팔다’가 아니라 ‘헤아리다’의 뜻이고, 介도 한 개, 두 개 할 때의 단위가 아니라 ‘절개가 있다’의 뜻입니다. 이 두 효는 모두 보아야 할 자리를 잘 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즉, 육삼은 위를 보아야 하는데 아래(초구,구이)를 보니 흉하고, 육사는 아래(육삼)를 보지 말고 위(구오)를 봐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九五, 孚干剝, 有厲.(깎으려는 것(양을 해치는 자)을 믿으면, 위태로움이 있다.)

上六, 引兌.(상육은 이끌어 기뻐하는 것이다.)

-보통 구오의 자리는 좋은 의미로 해석되는데, 태괘의 구오는 특이하게도 위태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앞의 효들처럼 보아야 할 자리를 못 볼 때, 즉 구사보다는 상육을 믿을 때 그렇다는 뜻이라 합니다. 상육의 풀이 중 ‘이끌어 기뻐한다’는 것은 기쁨의 시간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연장하려 할 때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받아들일 때는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重火離

三離火 : 離中絶

-음이 두 양 사이에 걸려 있습니다. 두 개의 불이 아래 위로 있어서 ,뜨거운 것이 위로 솟구치는 에너지(밝음, 덕을 베풂, 문명)를 뜻하는 괘입니다.

1)괘사 : 離, 利貞, 亨, 慉牝牛吉.(리는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고 형통하니, 암소를 기르듯이 하면 길하다.

2)효사

初九, 履錯然, 敬之, 无咎.(초구는 발자국이 교차하니, 공경하면 허물이 없다.)

六二, 黃離, 元吉.(육이는 황색에 붙어 의지하니 크게 선하고 길하다.)

-履錯然은 발자국이 어지러운 상태로 처음부터 경거망동한 것을 말합니다. 또한 육이의 黃은 중하고 정한 자리를 말합니다.

九三,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구삼은 기운 해가 걸려 있는 것이다. 질그릇을 두드리고 노래하지 않는다면, 크게 기욺을(큰 늙은이가) 서글퍼 함이니 흉하다.)

九四,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구사는 급하게 오는 것이 불타오르는 듯하니, 죽게 되고 버림을 받는다.)

-구삼은 기운 해가 걸려 있는 때(하루 중 저녁, 인생의 노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역의 대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사는 부중하고 부정하니, 기세는 등등하나 왕위를 빼앗을 만큼의 힘은 없는 신하의 형세와 같습니다.

六五, 出涕沱若, 戚嗟若, 吉.(육오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슬퍼하는 것이니, 길하다.)

上九,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상구는 왕이 정벌을 나아가서 치면 아름다움이 있으리니, 괴수만 잡고, 잡아들인 자들이 일반 무리가 아니면, 허물이 없으리라.)

-육오는 군주의 자리로서 군주가 눈물 흘리고 슬퍼해야 길하다는 것은 다스림에 있어서 강경책을 쓰기보다는 유함을 써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말합니다.(유비처럼) 상구는 정벌을 하더라도 무리를 잡아들이지 않고 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교시:독송-박시연 선생님

오행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박시연 선생님은 ‘오행, 관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제목으로 천지만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연결고리로서의 오행을 살펴보았습니다. 상생상극의 관계를 잘 알아 자연과 인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잘 맺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께 해 봅니다.


3교시:글쓰기-채운 선생님 『글쓰기와 반시대성,이옥을 읽다』

글쓰기의 욕망은 무엇인가? 언어는 계속 미끄러지고, 언어로는 세계를 포착할 수 없음에도 , 참기 힘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왜 글쓰기인가? 200년 전 시대와 불화한 한 인물, 이옥은 왜 그렇게 자신의 글을 쓰려고 했고 우리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처음부터 강렬한 질문 속에서 채운 선생님의 나지막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항적인 것과 저항적인 것의 규정성은 다르다, 억압하는 것이 먼저 있고 그것에 반하는 저항이 존재하는 근대 저항 개념이 아닌, (푸코나 들뢰즈가 말하는) 저항의 다원화의 개념으로 이옥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이옥은 저항적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의도해서 된 일이 아니라 그냥 하고픈 대로 했을 뿐인데 사실은 그것이 스스로가 원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문체란 글쓴이의 삶의 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원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또 니체는 시대의 고착화된 상식과 그 시대가 강요하는 양식을 비껴가는 것을 ‘반시대성’이라 했습니다. 시대의 다수성에 어긋나는 소수적인 어떤 것, 모든 시대에는 ‘아직은 아닌 어떤 것’이 다음 시대의 징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시대성은 곧 동시대성이기도 합니다.

이옥의 시대에는 더 이상 성리학적 글쓰기로 포획되지 않는 틈새들이 있었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 이옥의 글쓰기였습니다. 아직은 시대가 허용하지 않는 때 이른 글쓰기, 그러나 죽는 날까지 그것을 끝내 버리지 않은 삶, 결코 위대하지 않지만(심지어 채운 샘 취향의 글쓰기도 아니지만) 시대의 균열 징후를 끝까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옥과의 인연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매력을 읽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글쓰기! 루쉰이 말한 것처럼 모기가 문 작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일어난 절실함, 그것을 쓰는 것! 글쓰기는 ‘내가 산 것’만을 쓸 수 있을 뿐이므로 품고, 싸우고, 받아들이고, 밀쳐내는 내 몸의 절실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합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미세하게 이탈하면서 자기를 끝간 데 없이 변형해 나아가는 루쉰의 혁명처럼 우리의 삶도, 글쓰기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옥의 저항, 이옥의 글쓰기! 그것을 어떻게 우리 시대의 저항과 글쓰기로 불러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댓글목록

랑랑님의 댓글

랑랑 작성일

몸은 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채운 선생님의 지난주 강의 정리가 오늘의 내용과도 맞닿아 있어 다시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