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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에세이 조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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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굿만 작성일16-04-12 17:22 조회1,9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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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삶과 글쓰기의 저항 조은만
에세이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시간, 문성환선생님께 이옥의 글에서 나의 모습이 겹쳐져 위안을 받았는데 그 점을 글로 쓰면 과제에 대한 초점이 근접한가를 질문을 했었다.
답변은 내가 생각했던 범주를 벗어난 새로운 관점 이였다.
글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책을 읽으면 많은 책을 읽어도 자신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 이였다. 그리고 뒤에 한 말은 삶과 글쓰기는 자신을 책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들을 찾아내 사유하고 그것을 삶과 이어가서 자신을 변혁시키고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되어졌다.
뒤통수를 치는 것이라 --- 다독을 하는 편이고 경제적인 사정에 의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좋은 글귀들을 필사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공감해서, 어떤 때는 문구가 감동적이라서, 어떤 때는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데 중요한 듯해서 등등 그런데 “뒤통수를 친다.”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반문해보게 되었다. 일단 “뒤통수를 친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따라 그런 적도 있고, 또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의 말은 약속된 공통의 단어들로 소통되기 때문에 형상적인 것들을 주고받을 때는 큰 차이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나눌 때는 사람마다 그것들을 지칭하는 선택한 단어의 결이 달라 그 결에 가깝게 접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뒤통수를 친다는 말보다 나에게 더 큰 울림을 준 말은 즉 나에게 통용되는 뒤통수를 친 말은 자신을 발견하는 책읽기는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 이였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그 말이 충격적 이였던 것은 스스로 항상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 가시나무 노래 가사 중 일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고, 잊고자 했던 책읽기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는 일 이였나 하는 반문을 하게 하는 말 이였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누구나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유년 시절 언니, 동생의 죽음을 가까이 경험하고, 엄마와 거의 50년 정도를 같이 살면서 한 생의 마감을 경험하고, 다시 2014년 남편의 반생의 마감을 경험하였다. 상대에 의한 간접 삶의 경험일지라도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서로에게 얽혀 있었기에 몇 번의 삶을 살고, 죽고, 살아남은 듯 했다. 살아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던 시간들. 2014년 여름 40여 일간의 병원 생활. 죽음을 향하는 시간 속에서도 시간을 잊기 위해 짬짬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두주 정도 어디로도 도피를 할 수 없는 시간들. 그 시간들을 온전히 겪고 2016년 왜 와 있는지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며 수성에서 공부라는 것을 하고 있다. 지금도 묻고 있다 왜 공부를 하는 걸까? 삶과 죽음은 너무나 가까워 삶에게만 무게를 또는 죽음에게만 무게를 주기도 싫었다. 그럼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기도 싫어 순간들의 감정에 나를 버려두기도 했다. 그렇게 나라고 하는 것에서 도망치다가 나라는 것을 붙잡아 대면하고, 그러다보니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가 절실하게 궁금해졌다. 언제부터인가 누가 무어라 한 것도 아닌데 왜? 라는 화두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 때때로 잊었다가 다시 붙들게 되고 그런 반복이 이제는 머리로만이 아닌 가슴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버린 것이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일까 알프레드 히치콕감독의 영화 새를 떠올리게 하는 까치가 빽빽이 앉아 있는 전봇대가 어른거리는 창문을 보며 수성오리엔테이션을 듣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부터 지금까지도 왜 수성에서 공부하는가에 대하여 계속 자문한다.
명예, 돈, 인정, 자기발전 그 어떤 거창한 것도 아니다. 현재는 “그저 하루를 잊고 싶었다.”가 가장 답에 근접하다. 즉 나를 잊고 싶었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내가 만들어 놓은 나라는 것이 떠올리는 무수한 사념들로부터, 어떤 단어를 붙여야 맞는 지도 모르는 무수히 발생하는 미발의 단상으로부터. 그리고 또 질문을 해 된다. 끝없이 나라고 여기는 것에게 왜? 왜? 왜? 미로처럼 얽힌 길을 간신히 벗어나면 다시 시작되는 미로처럼 반복되는 자체를 잊고 싶었다. 어떻게 걱정을 치료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걱정할 만한 몸으로 걱정할 만한 땅에 처했고, 걱정할 만한 때를 만났다. 걱정이란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인데 마음이 몸에 있으면 몸을 걱정하고, 마음이 처하는 것에 있으면 처하는 곳을 걱정하고, 마음이 만난 때에 있으면 만난 때를 걱정하는 것이니, 마음이 있는 곳이 걱정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이동하여 다른 곳으로 가면 걱정이 따라오지 못한다. 지금 내가 술을 마시면서 술병을 잡고 흔들어 보면 마음이 술병에 있게 되고, 잔을 잡아 술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면 마음이 술잔에 있게 되고, 안주를 덜어 목구멍으로 넘기면 마음이 안주에 있게 되고, 손님에게 잔을 돌리면서 나이를 따지면 마음이 손님에게 있게 되고, 손을 펼칠 때부터 입술을 닦는 데에 이르기까지 잠시 걱정이 없다. 신변에 걱정이 없어지고 처한 곳에 걱정이 없어지고, 때를 잘못 마난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니, 이것이 내가 술을 마시면서 걱정을 잊는 방법이요,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나는 그 말을 옮게 여기고, 그의 심정을 슬프게 생각한다. 아아! 내가 봉성에서 지은 글이 또한 동인이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인가. (『봉성문여』「소서」)(채운 선생님이 쓰신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책에서 채운 선생님은 이옥의 자서전을 대체할 수 있는 글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글을 내밀겠다고 쓰셨다. 이러하니 내가 어찌 이옥을 이 글을 그냥 지나칠 수 가 있겠는가. 미로에 지쳐 미로의 일부로 정지되어 버릴까 할 시기에 이옥을 만났는데 어떻게 다른 주제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었다. 나만 이러한 것은 아니 구나 그리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하는 위로와 안도를 받았다. 그러니 이옥을 만나는 것이 에세이의 주제와 벗어나더라도 현재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다. 채운선생님이 이옥의 저항은 ~애 대한 저항이 아닌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는 저항이라고 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보다 현재 “그럴 수밖에 없다.”가 나에게는 적용된다. 그렇다면 나 는 새로운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에게 저항이란 단어는 낯설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이옥의 이 글을 만난다.
덕유산 지맥이 나란히 뻗어 나가다가 동쪽으로 오십 리쯤에서 멈추는데, 그 사이는 골짜기이고, 골짜기 속에는 물이 있다. 물의 성질은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어서 장차 동쪽으로 바다에 다다를 것인데, 양쪽 산이 버티고 있어 나아갈 수 없다. 그리하여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으면 동으로 가고, 산이 서로 뻗어 있으면 서로 흘러 산줄기를 따라 천천히 흘러가서 마치 뻗어나간 그 뒤를 쫓는 듯하다. 혹 내달리다가 폭포가 되어 튀기도 하고, 혹 파 뒤집어 웅덩이가 되기도 하고, 혹 갇혀서 못이 되기도 하고, 혹 달려 나가 개천이 되기도 하고, 혹 모여서 소용돌이가 되기도 하고, 혹 샘솟아 간수가 되기도 하고, 혹 흩어져 물굽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로 막혀 그 뜻을 얻을 수 없다. 그리하여 물속의 돌을 만나 그 노함을 쏟아 보낸다. 하지만 돌은 굳세고 단단한 것이어서 물의 노함을 받아도 편안해 한다. 누워 있는 것도 있고, 서 있는 것도 있고, 엎드려 있는 것도 있고, 웅크리고 있는 것도 있고, 겨루고 있는 것도 있고, 키처럼 쑥 뻗어 있는 것도 있고, 물에 씻기고 있는 것도 있고, 물을 마시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니 물이 돌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떠들썩하고 벼락 치듯 부딪치고, 휘돌아 뛰어 오르고, 들이받아 날뛰고, 설치다가도 때때로 다시 안온하고 정답게 흘러, 길가는 사람과 더불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남정십편』중 수유)
이옥은 물로 자신을 잊지 만 잊혀 진 자신은 물성으로 나타나고, 물의 대상인 돌로 나타나고 그리고 물과 돌을 공유하는 공간과 사람까지 어우러지는 전체로 나타난다. 즉 그냥 글 자체의 이옥이다. 그러니 그것을 무어라 지칭하고 단어를 붙일까 싶다. 그냥 이옥. 채운선생님은 정말로 멋지게 저항이라는, 반시대성이라는 단어를 이옥에게 부여했다. 채운선생님을 만난 것은 이옥에게는 무엇이었을까? 행운, 보상. 그는 가고 없다. 현재의 나의 생각은 여기에서 멈춘다. 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이옥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벗어나고 싶었는데, 벗어났다 싶으면 어느 덧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한계를 부여잡고 어쩔 수 없다는 것으로 삶을 엮어간 것은 아닐까?
세상에 그대가 없다고 하여 손실될 바가 없고, 그대에게 세상이 없어서 또한 욕될 바가 없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뜻을 행하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따를 것이다. 그대가 돌아가지 않으면 누가 돌아갈 것인가 매암매암 마땅히 돌아갈 것이로다. (『잡제』「매미의 권고소서」) 결과적으로 뱀처럼 탈피를 해도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큰 형태의 변화가 아닌 다른 표피를 가진 똑같은 뱀인 삶. 그러나 이옥은 자신을 매미로 표현했다. 애벌레에서 형태가 변하는 매미로.
이옥은 문득 『장자』의 소요유를 떠올린다. 단, 『장자』가 보여주는 극대의 세계가 여기서는 극미의 세계로 변환된다. 장자가 곤과 붕이라는 거대한 존재들을 상상함으로써 현실을 초월한다. 그의 소요유는, 곤처럼 현재의 지평에서 벗어나 붕처럼 높이 비상해야만 가능하다. 삼천리나 되는 날개로 구만 리 창공을 6개월간 쉬지 않고 날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 장자는 그 지점에서 현실을 다시 사유한다. 인간의 세계란 얼마나 작고도 작은가. 인간들이 움켜진 신념과 가치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인간이란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가. 이에 비해 이옥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인간세계를 초월하고자 한다. 벌레의 세계, 거기엔 일체의 문명이 부재한다. 번뇌도, 노동의 고단함도, 문화도 없는 세계. 인간의 탐욕과 가치의 위계가 부재하는 세계. 벌레의 실존이 고스란히 긍정되는 세계. 이옥은 붕을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벌레의 세계는 붕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벌레와 붕 모두 현실의 지층에 포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유하고 지배적 가치를 회의한다는 점에서 극대와 극비는 이렇게 통한다.(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33p)
채운선생님이 책을 통하여 이옥을 알리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평생 이옥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채운선생님의 공덕으로 이옥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 에너지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아가게하고, 또 그 과정이나 결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그런 붕 같은 사유나 삶도 있다. 그러나 벌레처럼 살아내는 것만 으로 위안과 격려가 되는 삶도 있다. 에세이 과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오만원이란 돈을 버는 거야 하며 단순하지만 행동의 결과를 낳는 동기에 빠져 나라는 것 자체를 잊고 과제를 하고 있다. 암송을 할 때 마다 얼마나 나라는 사람이 나라고 하는 틀에 갇혀 있는 가를 여실히 느끼며 그들이 쓴 조사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쓴다. 겹겹이 쌓여있는 수많은 나로 채워진 나라는 존재에게 암송과 암기는 너무나 큰 스트레스다. 그러나 나라는 것을 잊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암송과 암기는 특효약이다. 암송과 암기는 할 때마다 힘들고 버겁다. 그러나 그 버거움이 나를 잊게 만든다. 결국은 또 도피인가 나를 만나기 싫어서. 지인들은 묻는다. 왜 공부하느냐고, 공부하면 자격증이 나오느냐고 그 공부는 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무어라 답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라고 주장하는 것을 잊기에는 최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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