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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학기 화성 개인낭송 텍스트 3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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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로 작성일19-07-04 17:04 조회9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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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일 2학기 화성 개인 낭송- 3조 이진아
출처: 나츠메 소세키 <문학예술론> 3장 '연극론'  4부 '문외한과 전문가', 461~463쪽 

  문외한은 원래 부분적인 연구나 관찰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 대신에 커다란 윤곽에 대한 제 1의 인상 만큼은 이 윤곽 속에서 금붕어처럼 허우적 거리며 떠있는 전문가보다 선명하게 포착하고있다. 전문가들처럼 세부적인 예리함은 얻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예술 전체를 한눈으로 파악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짓무른 전문가의 눈동자보다 확실히 생동감이 있음에 틀림 없다. 후지산 전체는 후지산을 벗어났을 때에만 확실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예술의 문에 막 들어서는 순간에 이 위험은 이미 예술가의 머리에 떠오르게 된다. 사심 없이 그 문에 들어설 때조차 그러하다. 부여된 윤곽을 시인하고, 그것을 부수어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상, 그가 작업할 수 있는 자유는 아무리 해도 극소의 공간 사이를 방황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래의 유형과 법칙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보수적인 예술의 경우에는 개인의 자유를 거의 말살하고 만다. 이러한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예술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 노라든가 무용, 그리고 수구파의 회화가 모두 그러하다. 이러한 예술들은 애초부터 부여된 윤곽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약속 아래 성립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활동하는 예술가는 설령 윤곽을 잊어 버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잊어버린 것과 동일한 결과에 빠져서 오십 보 백 보 사이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발견하려고 고심할 뿐이다. 문외한의 눈은 이러한 방면에 있어서도 전체의 틀 안에서 예술의 전경, 즉, 전체적인 뷰를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전문가보다 훨씬 우월하다. 
  이렇게 되면 세속에서 말하는 전문가와 문외한의 위치가 저절로 전도되지 않을 수 없다. 문외한이 위대하고 전문가가 시시한 존재로 전락한다. 언뜻 생각하면 불가해한 패러독스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일반적인 역사를 조망해 보면 이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진다. 옛날부터 위대한 예술가는 수성하는, 즉, 이뤄놓은 것을 지키는 존재이기 보다는 창조하는 존재였다. 창조자인 이상, 그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 문외한이지 않을 수 없다. 인간들이 세운 문에 잠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문을 세우기 위해서는 순연한 문외한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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