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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2주_주제선정(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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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루시 작성일19-10-28 21:50 조회9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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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 화성 4학기 2-소논문 주제 정하기(3 임영주)

발견으로서의 관계

  학교에 있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아이들이나 학부모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입신이나 안위만 생각하는 관리자들, 뒤에선 욕하면서 정작 회의 때는 아무  않고 자신의 수업만 신경 쓰는 교사들이 나를 일하고 싶지 않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따라서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해가 달라질 때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가 항상 스트레스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별로인 사람을 만나면 피하려 하고, 실망 아니면 분노하거나 어쩌다가 교무실 분위기가 좋으면 어떡하든 계속 함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나의 태도였다. 일을 계속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경력도 쌓여가는데  다르게 맺고 싶다는 간절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교육 공동체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도 없는 사람들과 일하는  나의 태도가 변할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싫으면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새로운 관계를 찾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이것 역시 뭔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p.66 그러므로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과 이웃의 삶을 촉진해야 한다!  모든 ‘해야 한다라는 당위와 ‘그러므로라는 근거가 미래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필연적으로 언제나 자기 가신으로부터 아무 목적 없이 생겨나는 것을 이제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이성과 궁극적 목적으로 인간에게 비춰지게 하는 -현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윤리의 설교자가 등장하는 것은 이것을 위한 것이다.

p.69 2. 지적 양심.-사람들은 저마다 당신을 낯선 눈길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저울을 가지고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고 말한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성이나 반대의 궁극적이고 확고한 근거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의식하지 않거나 혹은 그러한 근거에 대해 사후에나마 생각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이런 저런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경멸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재능 있는 남자들이나, 가장 고귀한 여자들도 이러한 “대부분의 사람들 속한다. 그러나 인간이 선의, 세련, 천재성 등과 같은 덕들을 믿고 판단함에 있어 그저 느슨한 감정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라면, 고귀한 인간과 저급한 인간을 구분하게 해주는 확실성에 대한 요구가 가장 깊은 내적 욕구와 가장 심오한 요청이 아니라면, 도대체 내게  덕들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반면에 이러한 부조화의 조화 상태, 현존재의 경이로운 불확실성과 애매성 한가운데에 머물며 물음을 던지지 않는 , 물음의 욕구와 기쁨 앞에서 몸을 떨지 않는 , 심지어  물음을 던지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조차 하지 않고 그에게서 피로한 즐거움을 느끼는 -이것이 바로 내가 경멸하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나는 ‘교육 공동체 대한 이상적인 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다. 학교 관리자라면, 교사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나만의 생각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나의 당연함을  번이라도 제대로 의심해봤냐고 물어본다. 내가 말하는  이상적이고 바람직함 이란 것도 사실은 내가 느끼기에 가장 편안하고 좋다는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이상적이거나 보편적임, 바람직함 뒤에 숨어서 결국  좋은 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나의 이런 ‘교육 공동체 대한 바람직함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그것으로 어떤 때는 좋아하고,  한편 실망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그래서  관계는 결핍이고 부족한  투성이였다.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정해놓은(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믿는) 관계는 일단 나조차도 기준 미달인 이상적인 관계였다.  맞는 것은 없다.  맞는 것은 결국 세상이 관계가 나에게  맞게 편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다는  위주의 관계에 대한 망상이었다. 내가 얼마나  자신을 쉽게 합리화하고  좋을 대로 생각하는 인간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p.91 21. 사심 없기를 가르치는 설교자들에게 

  (..)교육은 철저하게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교육은 일련의 매력과 이득을 열거함으로써 개인에게 어떤 하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주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습관과 충동, 정열이 되면 그의 궁극적 이익에 반대되는 “보편적  그의 안과 위에서 그를 지배하게 된다. (..)우리의 “이웃 사심 없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이를 통해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이웃이 스스로 “사심 없이생각한다면, 그는 먼저  힘의 손실과 개인적 피해를 자기 자신을 위해 거절하고 그러한 경향이 생겨나는 것에 저항해야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심 없음을 “좋지 않은 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이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려야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의 모순이 드러난다.  도덕의 동기가 그것의 원칙과 대립되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도덕에 모순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고 요구되는 개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몰락을 초래하는 존재에 의해서만 선언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나 사회가 이익을 위해 이타주의를 권하면 “그대는 다른 모든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당신의 이득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그에 대립되는 명제가 동시에 발효된다. 다시 말해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한꺼번에 설교되는 것이다!

 

p.114 44. 믿을 만한 동기.-인류가 지금까지 행동해온 실제의 동기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만 인식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이런저런 동기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 인류가 지금까지 이것이 자신의 행위의 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해온 것이다. 인간의 내적인 행복과 비참은 이런저런 동기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따라 이루어졌지 실제의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후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이차적 중요성을 지닐 뿐이다.

 

 : ‘관계는 이러해야 라는 당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맺어야 좋을 것이다, 나쁜 관계를 맺으면 나쁘다.  생각도 관계를 맺기 전에 이미 가지게 된다. 벌써 나쁜 것과 좋은 것이 시작부터 정해놓고 있다. 이러면 관계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칠  있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도 없다. 결국 “좋은 관계는 이러해야 라는 생각에는 내가 관계에서 상처받기 싫다는  위주의 생각,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말에 공감하는 척했지만, 항상  생각이 맞다. 라는 생각이 있었던  같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기준이나 가치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릴 것이란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가치, 기준을 가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생각이 보편타당한 것에 부합하니까 상대방이 틀렸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비판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상대방의 주장이나, 내가 맞다고 믿는 나의 믿음이나 결국은  좋을 대로의 믿음이고 주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판단하고 있는 옳고 그름, 선악에 대한 판단이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의 판단이었음을 보게 되었다. 내가 판단하는 것에도 오류가 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에도 오류가 있듯이. 나는 올바르고 상대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전제가 관계를 결핍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틀리고,  생각은 합리적이니까 맞아. 내가 싫어하던 전형적인 꼰대와 권위적인 사람의 태도였다. 이런 나의 생각이 오히려 관계를 고립되고, 결핍된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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