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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두번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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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맥박 작성일19-10-28 21:55 조회9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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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영 / 4학기 소논문 쓰기


(이기적인) 사람들이 병들어 가고 있다


문제제기(수정) 

사회적 이슈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나와 주변의 이야기가 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고, 되려 사회적 문제로는 대두된지 오래인데 뒷북처럼 나의 사적 문제로 맞닥뜨리고 있구나하는 생생한 체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세 번의 학기를 거치는 중에도 그런 체험을 했다. 정신적으로 ‘지친다’, ‘힘들다’, ‘무기력하다’, ‘권태롭다’, ‘귀찮다’, ‘우울하다’라며 신음하는 말을 들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스스로를 병자라고, 아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들의 커밍아웃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황스러웠던 것은 심지어는 나조차도 그러한 감정이 병이 될 수도 있겠구나하고 짐작한 바 있었는데 그들이 약으로도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며, 살기 힘들다고 외칠 때까지 “세상 다 그렇게 사는 거지모...”라며 다시 한번 대수롭지 않게 나나 타인의 감정을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넘겼다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다. 이번엔 “세상 이렇게 살텐가!”라며 나의 앎과 경험을 강요하고 과도하게 꼰대짓을 일삼는 감정의 양극화도 경험하게 됐다. 무엇보다 클라이막스는 그 끝에서 다시 한 번 자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느새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생각됐다. 학기 초에 무기력하게 겪었던 감정의 매커니즘을 니체를 만난 후 캐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너 잘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거지같은 흐름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번엔 붙들고 늘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에게, 주기적으로, 패턴화 되어 반복되는 이 감정의 매커니즘을 이미 온라인 상에서는 ‘우울증을 겪는 친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등등의 제목으로 다양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병을 맞아드린 자의 약방문일 뿐이다. 병을 잘 겪어 내어 면역력을 높이려면 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때문에 계보학이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을 성찰하기 어렵고, 감정의 불균형을 방조하고, 복잡다단한 마음의 뿌리와, 집착과, 분노와, 자책(가책)과, 무기력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감정을 왜곡했던, 자기기만을 일삼았던 고대 노예들의 실천과, 유대인과, 사제들의 금욕주의를 이해하고 그들이 자타의 감정을 왜곡하기 위해 기준 삼았던 ‘도덕’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고찰한 니체의 독창적인 해석과 긍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씨앗문장 채취
 
- 병의 압박에 의해 생겨난 사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그러면 무언가가 튀어나와 정신을 현장에서 포착할 것임을 알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정신의 현장이란, 허약, 개심, 포기, 완고, 음울 등 건강한 때에는 정신의 긍지를 허용하지 않는 정신의 모든 병적인 상태를 뜻한다. (<즐거운 학문> 서문2. p.25~26)

: 니체는 심리학자 자신이 병이 든다면 철학을 병과 관련하여 집중하려 들 것이라고 말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추측한다. 하나는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결여 됐다고 느끼는 것을 해소하거나 채우기 위해 위안이나 약, 구원, 저항, 자기소외 등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가지게 된 새로운 시각,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여지로부터 풍요로움과 활력이 깃든 철학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위 씨앗문장에서 우리의 상식적 표현을 뒤집는다. 건강한 때는 허용하지 않는, 정신의 긍지를 사용하지 않는, 흔히 우리가 정상이라고 일컫는 상태가 바로 ‘정신의 모든 병적 상태’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니체가 병든 상태를 긍정하는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짧은 예라고 생각됐다.


-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의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 다른 것’, ‘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 행위인 것이다. (...)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도덕의 계보> 단편10. p.367)

:  상상으로 복수하고,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기만을 일삼게 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들은 원한의 감정을 행위로 드러내길 포기하고 외부의 것, 다른 것,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긍정한다고 말이다. 언뜻 우리의 현재 가치로 생각해 보면 노예의 도덕은 이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상상으로 무협영화 한편을 만들어 복수를 완성하고,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잘 컨드롤하는 묵직한 수행자의 모습에 빙의해 하루를 견디었다, 대견하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대가, 우리 사회가 그러한 태도를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니체는 결정적으로 그들의 그런 태도에 원한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자신 이외의 것들을 부정하는 것,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 외부의 것들을 부정하는 것, 그 ‘부정’의 감정들이 원한을 만든다고 말이다. 이후 니체는 사제의 금욕주의적 실천에서도 이 원한의 감정을 발견하고 그들에게서 이 감정들이 신경증과 내장질환 등의 여러 병적 증상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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