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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3주소논문주제선정(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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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루시 작성일19-11-04 21:46 조회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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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 화성 4학기 3-소논문 주제 정하기(3조 임영주)

발견으로서의 관계

학교를 옮길 때마다 혹은 한 해가 달라질 때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하다. 그래서 나는 별로인 사람을 만나면 피하려고 하거나, 피할 수 없으면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다. 혹은 어쩌다가 분위기 좋은 학교나 교무실을 쓰게 되면 어떡하든지 계속 함께 있으려고 전전긍긍한다. 뭐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관계의 호불호를 미리 정해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가 경직되어 있고 유연하지 못하다. 한번 별로인 사람은 끝까지 별로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아예 관계가 틀어지고 무시한다. 반면, 어쩌다 교무실 사람들이 좋으면 어떡하든 다음에도 함께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해에 좋았던 관계들이 다음 해는 오히려 어색한 관계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내가 만든 관계에 나도 얽매여서 별로인 사람을 싫어하는 나도 싫고,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싫은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나?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니체는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별로라고 판단하는 것에는 넌 틀리고, 난 맞다라는 나의 판단이 있다고 한다. (지적양심)나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상대방은 권위적이니까 틀리다는 내 생각에는 한 번이라도 의심을 해보았냐고 되묻는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도 사실은 그 사람처럼 나 좋을 대로의 판단이고 합리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맞고 틀릴 경우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계에서 쉽게 실망하거나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관계에서 좋은 관계만 맺으려 하고 싫은 관계를 피하려 한 또다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손해를 받는다는 피해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 판단에서 강한 확신을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약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받기 쉬운 존재라는 생각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나쁜 관계에서는 내가 상처를 받는다는 생각은 니체의 힘의지에서 생각해보면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고 한다. 과연 나는 약한 사람인가?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니체의 지적 양심에서 보았을 때는 자신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유리한 대로 쉽게 생각하고 단정해버린 나의 문제 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관계를 지속하면 좋은 관계만이 아니라 나쁘다고 생각하는 관계를 통해서 나의 역량이 커질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진다. 그래서 관계가 경직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디가 좋은 관계일까 찾아 다니지 않고 어떤 관계에 나를 내던져도 내가 괜찮을 거라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람, 어떤 관계에서도 새로움과 충만함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는 것.

 

277. 개인의 섭리.-

... 즉 이제 더없이 예리한 힘을 지닌 개인의 섭리하는 생각이 우리를 찾아와, 이제 우리가 손을 대면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최상의 것이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매일, 매시간의 삶은 오로지 그러한 명제를 거듭 입증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 어떤 것일지라도 그것은 즉시, 혹은 잠시 시간이 지나면 없어서는 안 될것임이 입증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깊은 의미와 효용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

=> 처음에 읽었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던 단편인데 이번에 읽을 때는 달리 읽힌다.

개인의 섭리신의 섭리가 아니라 개인의 섭리라... 이것을 보면 개인의 섭리를 가진 개인은 자신이 하는 것이 곧 자연의 필연성 안에서 사고하는 것이 된다는 것. 우리를 위해 깊은 의미와 효용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 => 그러니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유리하고 힘들지 않을까 고민하지 말라는 것

=> “우리를 위해 갚은 의미와 효용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다는 것에서 의 삶의 긍정과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복 받을 거야에 대한 삶의 긍정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어느 쪽이든 개인의 섭리 차원에서는 나에게 유용하고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므로.

 

303. 두 종류의 행복한 사람. - 삶에 즉흥적으로 대응할 줄 알고 있어서 요컨대 그는 계속해서 과감한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이들은 실제로는 모든 유한한 인간이 그런 것처럼 때로 실수를 함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그의 손이 신처럼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원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에서 실수를 저지른다. 그가 마음에 담았던 일은 이미 여러차례 그를 파멸과 몰락으로 이끈 바 있다. ...내게 가치와 성과를 지니는 일은 다른 데 있어. 나의 긍지와 나의 비참은 다른 곳에 있어. 나는 인생에서 자주 상실을 경험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어. 그 덕분에 나는 너의 모두보다 인생을 더 많이 경험했어!“

=>삶을 나의 의도대로 계획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실패와 절망, 좌절만을 맛볼 뿐이다. 이것은 삶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고, 온전히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계획과 원하는 삶의 방향이 나의 삶을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런 계획과 바라는 소망 때문에 내가 순간순간 느끼는 삶의 긍정도 다음으로 미룬다. 실수를 하지만 실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실수조차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319. 우리의 체험의 해석자로서.-이들은 자신의 체험을 인식의 양심에 관한 문제로 다룬 적이 결코 없다. “내가 원래 체험했던 것은 무엇인가? 당시 내 안에서, 그리고 내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내 이성이 충분히 명료했던가? 나의 의지가 감각의 모든 기만에 제대로 저항했으며, 망상에 용감하게 대처했던가?” .. 그러나 우리들, 그들과 다른 자들, 이성에-목마른 자들은 우리의 체험을 과학적 실험에서처럼 매 시간, 매일 엄밀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실험이자 실험용-동물이 되고자 한다.

=>나를 기만하고 있는 나의 인식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보라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낯설게 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   

326. 영혼의-의사와 고통.-내가 보이게는 고통과 불행이 항상 과장되어 이야기되고 있다. ...스토아적인 화석화된 생활 방식 과 교환하는 것이 이득일 만큼 우리의 삶이 정말로 그토록 고통스럽고 부담되는 걸일까? 우리는 그렇게 열악하게 살아야 할 만큼,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344. 우리는 아직 어느 정도로 신심이 깊은가. -...하하지만 왜 기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왜 기만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 즉 기만당하는 것이 해롭고, 위험하고, 불행을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기만당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 하지만..과연 그걸까?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정말로 덜 해롭고, 덜 위험하고, 더 적은 불행을 가져오는 것일까? 무조건적-불신이나 무조건적-신뢰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결정해버릴 만큼 그대들이 현존재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진리와 비진리 모두가 항상 서로에게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이 확신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실제로 진리와 비진리는 서로에게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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