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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세미나> 불교가 좋다 앞부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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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인 작성일13-12-19 05:25 조회3,970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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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언어들과의 만남인 것 같다. 한번쯤 들었거나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저자의 사고를 입으면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 나카자와 신이치와의 만남도 그렇다. 그는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 신화가 현실과 환상을 중개하며, 상호관계의 균형이 심하게 깨진 것에 대해 대칭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카자와신이치가 말한 대칭성은 유동적 지식, 야생의 사고, 신화적 사고 등 때에 따라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과 동물, 자연의 조화와 균형 회복을 뜻하는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간파한 인간의 자구책으로써 비대칭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어줄 장치로서 신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불교가 좋다>에서도 대부분의 초월적 종교에는 그 원점에 비대칭의 원리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온건한 신화적 사고를 몰아내고 세계를 제패했온 것, 특히 몽골제국의 등장이후에 이것이 더 심화되었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일신과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길인 종교의 초월성은 패권의 확대를 가져오고 비대칭을 심화시켰다. 하지만 불교만은 종교에 내포된 초월성을 부정하고 세계에 대한 대칭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가르침을 이야기 해왔다고 한다. 신화적 사고가 말라버린 현실에서 이미 굳어진 비대칭성을 깨버리는 혁명이 불교다.


 불교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한 것도 흥미롭다.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것이기에 공동체 원리로써 윤리가 중요했을 것이라고 한다. 또 한가지는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붓다 주위에는 상당한 지식인들인 양가의 사람들이 모였기에 일일이 윤리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윤리는 이미 당연한 것이고 남은 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두 종교의 성격이 규정될 수 있다. 기독교는 강력한 윤리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그 윤리는 유일신에게서 온 것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안중에 없고 신의 말씀을 어떻게 지킬것인가에 집중한다. 불교도 계율이 있지만 그것은 마음을 찾아 들어가는 지난한 길에 놓인 징검다리로서 의미일 것이다.


 예수의 기독교는 청년의 사상이고 붓다와 마호메드는 노인의 사상이라는 점도 다르다. 구이진 샘의 말처럼 청년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각기 다른 종교니까 다르겠지 라고만 생각했다. 청년이 갖는 이상, 신념, 진취성 ,비판정신, 개혁정신은 일신교와 잘 맞아떨어진다. 젊은 기독교는 그 파워로 세계를 주도해왔다. 기독교는 현실적 인간의 본능과 모순된 삶을 껴안고 가고자 하는 노회한 노인의 사상을, 그 성숙한 이해의 자세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나카자와신이치는 불교에 의한 제3차 형이상학 혁명을 이야기한다. 


 나카자와신이치는 일신교에서는 진리가 여성형이 아니고 남성형인데 불교는 처음부터 진리에 여성성이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때로는 여성성이 더 우세하다고 이야기 한다. 인간의 인식이 도달하는 지점을 반야뱌라밀다모(인식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불교의 수행은 이 ‘인식의 어머니’라는 거대한 여성적인 존재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갖고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융세미나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생물학적인 여성인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인식의 어머니라 이름붙인 여성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다. 책에서 불교수행의 과정과 비슷하다고 예를 든 사냥꾼의 경우 사냥꾼이 들어가고자 하는 생명을 주는 숲은 분명 여성성이다. 숲이나 대지, 자연은 모성 원형을 떠올리게 한다. 좋은 어머니와 나쁜 어머니로 대별되는 모성원형의 이중성도 자연에 있다. 나카자와신이치는 여성성에 대해 살아있는 여성들을 부정하고 상징으로 만들려는 경향, 구체적인 모성을 부정하고 모성의 끝에 존재한는 모성, 형태를 갖추지 않은 모성,  등으로 부언을 하지만 어렵다. 모든 영웅들이 반드시 거치는 과정인 육신의 어머니와 결별하고 생명의 원리, 원형으로서의 모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과 일체가 되려고 하는 노력이 불교수행인가 보다. 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거 맞다.


 ps 이진샘  후기 작성안하면 문자보낸다는 협박에 쫄아서 씁니다. 나의 문제는 ‘생산성’이라는 진단 명쾌하게 내려주시고 ‘세미나 후기쓰기’라는 애정어린 강제성을 부여하신 샘들 감사합니다. 함 시작해 볼랍니다. 근디 어렵구만유 ㅠㅠ

댓글목록

경희님의 댓글

경희 작성일

그래요  강제성이 없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ㅎㅎㅎ
우리에겐  불성이나 신성보다는 노예근성이 더 쎄다는 것을 .....

일명님의 댓글

일명 작성일

ㅋ 종숙샘, 문자협박 그거 은근히 무서워염^^ 아주 잘 읽었습니다. 이제 생산성을 높여보아요^^

이진님의 댓글

이진 작성일

저는 거의 평생을 한국 개신교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이 책이 술술 읽힙니다^^ 종교 아닌 종교, 혁명 아닌 혁명인 불교에 애정을 담뿍 담은 두 인자한 석학의 대담이 묘하게 저에게도 거울이 되어 다가 왔어요. 붓다와 예수의 삶이 서로 닮았으면서도 그 죽음이 너무나 다르기도 한 두 종교가 알게 모르게 무지하고 평범한 인간의 일상까지 끼쳐 온 영향은 어마어마하네요.....라인 김종숙샘의 후기를 기대하며 들어와보고 엄청 반가웠습니다~~~ㅋㅋㅋ 어제의 멘트는 협박이 아니라 격려였다고 정정하며^^ 어려운 첫발을 떼신 라인샘께 큰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