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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서당 세미나] 보편적 본질과 구체적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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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진 작성일14-02-14 18:42 조회4,37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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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팀 이름부터가 강렬한 ‘혈팀’(!) 막내 예진입니다.


개강과 함께 저희 혈자리 팀도 지난 주부터 다시 열공 모드에 돌입하였는데요.

이번 시즌에는 이쯔스 도시히코의 <의식과 본질>을 침뜸 책과 함께 읽기로 하였습니다.

처음 펼쳤을 때는 너무 어려워서 '허걱' 했었지만

그 만큼 한 구절 한 구절 해독될 때마다 감동이 있는 책인 것 같아요.

지난 주 동서양의 본질론에 관한 개괄에 이어

이번 주에는 <의식과 본질> 제2장 ‘개체적·구체적 실존, 보편적·추상적 본질’을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모토오리 노리나가라는 일본 학자가 등장했는데요.

이 사람은 중국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주역』을 단칼에 ‘허접 쓰레기’라고 잘라 말하는 쾌남 중의 쾌남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태극, 음양, 오행과 같은 개념들은 다 중국 사람들이 잘난 체 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황하고 번거로운’ 가공의 허구라는 거지요.

사실 노리나가는 『주역』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들을 배척합니다.

어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물을 추상화하는 순간 그것은 죽은 사물이 돼 버리고 만다는 거에요. 

따라서 그 추상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눈앞에 있는 그 생생한 사물을 살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을 꽃이라고 하는 순간 그 특정한 꽃은 무수한 꽃들 중 하나로 보편자화 되어버리니까요.

이때 그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그 무엇을 ‘보편적 본질’이라고 하고,

반면에 그 특정한 하나의 꽃만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특질을 ‘구체적 실존’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즉 어떤 사물이나 사상을 대할 때 그것의 보편적 본질보다는 구체적 실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사물의 구체적 실존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으로 노리나가는 ‘사물의 애틋한 정취론’을 이야기합니다.

사물을 언어를 통해 분절하고 보편자화 하기 이전에

그것과 직접 접촉하여 그 정취를 즉물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거지요.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그 자체로 만나서 마음 속으로 깊이 감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노리나가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현실에 있는 어떤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의 보편적 본질을 추구하느냐, 구체적 실존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둘 다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본질론의 철학적 성격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서 동서양의 다양한 사유들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본질론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그럼 어디 한 번 하나하나 만나볼까요?


우선 이슬람 철학의 전통에서는 (참고로 저자는 이슬람 철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입니다)

흥미롭게도 사물의 보편적 본질과 구체적 실존 모두를 오래 전부터 인정해 왔다고 합니다.

즉 하나의 사물에 두 가지 본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술어적으로도 구분한다고 하네요.

보편적 본질을 뜻하는 ‘마히야’와 구체적 실존을 뜻하는 ‘후위야’로 말입니다.

그러나 고전시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철학은 차차 후위야(구체적 실존)는 무시하고 마히야(보편적 본질)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고 해요.

또 여기서 저자는 심지어 후위야(구체적 실존)의 실재를 인정조차 하지 않은 채 마히야(보편적 본질) 위주로 사유를 전개해 온 예로 공자의 정명론과 중국 송대의 주자학 등을 꼽습니다.

흔히 사물을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너무나 멀리 분리시켰다고 비판을 받는 후설 현상학도 그 한 예가 되겠고요.


반면에 동서양의 많은 시인들은 오히려 후위야(구체적 실존)쪽에 관심을 기울여 왔어요.

물론 그 방법은 조금씩 다 다릅니다.

우선 릴케는 마히야(보편적 실존) 자체는 철저하게 배제한 채 후위야에만 집중했다고 해요.

사물을 마히야(보편적 실존)를 통해 보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그 획일성과 공동성이 싫어서라고 하지요. 

추상적 개념을 통해 무언가를 보았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사물이 아닌 거짓의 상(象; Bild)이 되어버린다고 말예요.

그런데 문제는 시인으로서 사물의 실존적 구체성(후위야)를 대체 어떻게 언어의 분절 작용없이 ‘언어로’ 표현하느냐 하는 거였어요. 머리를 뜯으며 고뇌하는 시인. 그리고 여기서 바로 표면적으로는 일상 언어와 다르지 않지만 그보다 한 단계 고차원적인 ‘시적 언어’가 탄생합니다. 기존의 말이 해체되고 새롭게 재배치되어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한편, 위에서도 잠시 만나봤던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일본 헤이안 왕조의 와카(和歌) 시인들에게 주목합니다. 

이 시인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의식 같은 걸 치루었다고 하는데요. 예컨대 봄비가 쏟아지는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드러누워서 ‘멍 때리고’ 봄비를 바라보는 겁니다. 봄비에 초점을 또렷하게 맞추는 대신에 그것을 몽롱하게 바라보면서 사물 본질의 규정성을 일부러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즉 이 ‘바라봄’의 의식은 마히야(보편적 본질)의 실재는 인정하되 그것을 애써 흐림으로써 세상을 다르게 보고자 했던 그들만의 노력이었던 셈입니다. 이 대목을 읽다보니 와카의 시가 대체 어떤 모습인지가 몹시 궁금해져서 다 같이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더랬습니다. 그 흥미진진한 세계은 각자 알아서 접속해 보시는 걸로 하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저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일본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릴케처럼 후위야(구체적 실존)에만 주목한 것도,

이슬람 철학이나 주자학처럼 마히야(보편적 본질)에만 치중한 것도,

또 와카 시인들처럼 마히야를 애써 흐릿하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미있게도 마히야가 후위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마히야를 ‘변치 않음’, 후위야를 ‘흘러감’이라고 정의하고

‘변치 않음’과 ‘흘러감’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표리일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변치 않음’이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 바쇼는 다음과 같은 멋진 설명을 덧붙입니다.

경험적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언가를 나(주체)와 분리된 사물(객체)로 접할 수 밖에 없지만

‘사심없이’, 즉 주객의 분리에서 벗어나 사물을 마주하려는 수련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어느 짧은 순간 어떤 사물의 개체적 리얼리티(즉 후위야)를 감각할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잡아서 밝히는 것이 시인으로서 자신의 숙명이라고요.



흥미진진했던 세미나 시간을 되짚으며 정리해 가다보니

후기가 예상과 다르게(?) 길어지고 말았네요. ^^;

다음 주에는 이즈쓰 도시히코 님이 우리에게 또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말라르메의 본질론이 예고되어 있었는데 그걸 또 ‘해독’하려니 몸이 말라르메...ㅎㅎ

다음 주 수요일 7시에는 <의식과 본질> 제3장 ‘본질과 존재, 일반화와 개체성’ 부분과

침뜸 책 32쪽 첫 문단까지 읽어와서 만납니다.

물론 그 날도 시성샘의 ‘시성천축국기’와 6명 모두의 투병기(앓는 소리)는 계속 되겠죠?

그럼 즐독하시고 그때 뵈어요~!!

댓글목록

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바쇼의 하이쿠를 다시 읽어보게 됐어요.
모든 것이 한순간이듯, 바쇼의 짧은 시가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예진후기 짱!~

건달프님의 댓글

건달프 작성일

긴 방학동안 잠시 뇌를 쉬었더니 의식과 본질이 흐릿하네요~하하.  '의식과 본질의 애틋한 정취론'을 느껴볼 수 있는 세미나를 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