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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테> 1권 강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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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파 작성일14-03-29 23:14 조회3,2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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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끼호테 1권 강의 후기    2014년 3월 29일   박경옥
 
돈키호테는 책에 대한 이야기다. 세르반테스는 ‘이 책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려깊고 가장 멋진 책이기를 소망했다. 만물은 자기와 가장 닮고 싶은 것을 창조해낸다는 자연법칙이’ 있다 거친 생각들로 가득 차 제멋대로 사는 한 작가가 감옥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돈 끼호테’이다. 작가는 이 책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 못생기고 아무 매력이 없는 자식을 둔 아버지도 제 자식에게는 사랑으로 눈이 어두워져 자식의 단점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친구들에게 자기 자식 자랑하듯이’ 이 책을 썼다고 눙친다. 책을 어떻게 읽든 아무런 존경심이나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독자에게 열어 놓는다.
세르반테스는 책머리에 이 책에 대한 온갖 비난과 칭찬을 피해가는 서사의 그물을 다 쳐놓았다. 그러면서 은근히 다른 책들을 비꼰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제욱시스까지, A부터 Z까지 유명한 작가나 사상가들의 이름을 책 뒤에 싣지도 않았다. 그 당시 유행하던, 책 맨 앞장에 붙이는 공작이나 주교, 귀부인이 쓴 쏘네트(14행 1연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의 한 형식이다)도 없다. 본인이 직접 썼다. 이 책을 권위있게 해 줄 어떤 장치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르반테스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울한 사람은 웃고 , 잘 웃는 사람은 더 웃으며 바보는 화내지 않고 점잖은 사람은 기발함에 감탄하며, 심각한 사람은 경멸하지 않고 진지한 사람은 칭찬하도록 하기를’ 원했다.
서양으로 넘어온 로드 클래식.<돈 끼호테>는 스페인에 대한 배경지식과 기사, 기사도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이해가 된다.
 
<스페인 역사 >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중심으로
스페인의 정치적 통일은 1469년 까스띠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왕의 결혼과 함께 성취되었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들이다. 그 두 카톨릭왕의 군대는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를 성공적으로 정복했고, 그렇게 해서 재정복을 끝냈다. 거의 800년 만에 아랍인들은 스페인에 항복했다. 같은 해 가톨릭왕은 끄리스토발 꼴론(콜롬부스)이 신대륙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스페인은 역사에서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 제국은 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예수회 신부인 하비에르는 1549년 일본에 도착했다. 서구세계와의 접촉은 일본의 생활의 모든 면을 바꾸어 놓았다.
스페인과 한국의 첫 접촉은 1593년부터다. 세스뻬데스 신부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와서 1년간 한국에 머물렀다.
16세기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스페인의 영토는 넓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이 시대를 황금세기라 부른다.
황금세기는 1세기 이상 지속된다. 이 시대에 스페인은 레반또에서 터키군을 물리친 돈 후안처럼 무적의 무사들, 돈 알바로 데 바산처럼 대담한 항해자, 수많은 극작품을 쓴 로뻬 데 베가 같은 훌륭한 작가, 그리고 돈끼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가 있었다. 그 시대에 스페인은 전쟁과 정치에서, 그리고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유럽 제1의 위치를 차지했다.
 
‘재능의 왕자’ 세르반테스
그는 1547년 마드리드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재난과 시련투성이였다. 22살에 이탈리아로 가서 1년 후 군인이 된다. 전투에서 그는 가슴과 왼쪽 손에 총탄을 맞아 불구가 된다. 몸이 완쾌되자 다른 전투에 참가했으며, 스페인으로 돌아올 때 해적에 의해 납치되어 알제리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는 5년 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내면서 탈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별 중요하지 않는 직책을 맡았으며 그는 자신의 잘못도 없이 두 번이나 감옥에 들어간다. 그러한 고난과 역경의 생애에도 세르반테스가 그토록 중요한 작품을 저술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1597년 수감되고 감옥에서<돈 끼호테>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1605년 마드리드에서 1권을 첫 출간한다. 2권은 10년 후, 1615년 나왔다. 죽는 날까지 창작열을 불태우다가 1616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불후의 명작은 < 재치있는 시골 귀족, 돈끼호테 데 라만차>로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이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스페인 역사 ,삼영서관 박철 편역에서 발췌) 
 
기사도(騎士道)
중세 서유럽 봉건 제도의 꽃으로 불린 기사들 사이에서 성립한 규범의식 또는 행동양식의 이상형. 봉건제도가 전성기에 들어간 11세기에 발생하여 12∼13세기에 흥륭기를 이루었고, 14∼15세기에 형식적으로는 완성을 보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타락하여 퇴색해 갔다.
기사도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었는데, 기사 서임식(騎士敍任式)의 선서에서 알 수 있는 덕목(德目)은 무용(武勇) ·성실(誠實) ·명예 ·예의 ·경건(敬虔) ·겸양(謙讓) ·약자보호 등이 있다. 기사의 존립조건이기도 한 무용과 성실은 초기에 있어 기사도의 핵심을 이룬 덕목이었다. 그 후 십자군시대에 기사도는 그리스도교 윤리를 받아들여 경건 ·겸양 ·약자보호라는 덕목이 보태어졌다.
십자군시대부터 교회의 영향 밑에 행동의 세련에 관한 덕목이 강조되기 시작하여 약자보호는 물론 부인(婦人)에 대한 봉사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무기와 전술이 바뀌고 기사의 기반인 봉건제도가 무너져 감에 따라 기사의 사회적 몰락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퇴색일로에 처했던 기사도는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고취되어, 기사도의 몰락 후에도 변형된 모습으로 전수되었는데 거기에서 서양의 신사도가 나온 셈이다. 자존심의 존중, 관용 ·봉사, 여성에 대한 남성의 엄격한 예의 등이 발전을 보았다.
서유럽에서 중세 이래 기사문학 작품이 많이 쏟아져 나온 것도 기사도가 사회생활 속에 얼마나 깊고 넓게 침투하였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두산백과
 
기사도 문학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성행하던 기사도와 귀부인 숭배를 주제로 한 설화문학의 총괄적 명칭. 전쟁과 무공을 묘사한 무훈서사시나 영웅서사시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궁정풍(宮廷風)의 작품을 가리킨다. 라틴문학을 모방한 설화로부터 설화양식을 빌렸고, 서사시로부터 여행과 무용의 내용을 이어받았으며, 연애서정시로부터 연애의 소재와 궁정 취미의 영향을 받아 상층계급을 대상으로 한 귀족적 성격의 문학양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관념상 여성의 신비와 연애의 도식화에 따라 사모하는 귀부인을 위하여 무훈을 추구하고 고난을 견디며 굴욕까지도 참는 기사 ·귀족 사회의 이상을 표현하였다. 봉건제도의 확립과 함께 잠정적이나마 평화가 찾아옴으로써 궁정이나 대제후(大諸侯)의 저택에는 왕비나 제후 부인을 중심으로 한 부녀를 위한 화려한 별실이 생겼는데, 그곳을 출입하는 기사들은 당연히 품행이 바르고 정조(情操)가 세련된 사람이어야 했다.
기사는 본래의 책무인 귀부인들의 수호를 위해서 당연히 강한 힘과 아울러 기사로서의 예절을 체득해야 비로소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범적인 예절이 기사도였다. 그 중요한 것의 하나가 귀부인 숭배정신이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마리아 숭배사상의 세속화라고 볼 수 있다. 귀부인 숭배의 밑바탕에는 연애감정이 있었으며, 그 감정을 지탱하는 것이 ‘귀부인에 대한 봉사(Frauendienst)’ 정신이었다. 기사는 귀부인에 대한 숭배 또는 봉사를 계속되는 모험과 무용이라는 행동세계에서 실현하였다. 이러한 기사의 모험담을 일반적으로 기사도 이야기라 한다.
영국 아더왕의 궁정에 모여든 ‘원탁의 기사’ 이야기가 그 전형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2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C.드 트루아가 샹파뉴 백작의 궁정에서 썼다고 하는 《에렉과 에니드:Erec et Enide》, 영국의 플랜태저넷(P1antagenet) 왕조의 시조 헨리 2세의 궁정에서 일하던 H.토마가 쓴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1170년경)를 들 수 있는데, 특히 토마의 작품은 전 세계를 풍미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H.von 아우에가 기사 전설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1195)를 썼고, V.von 에셴바흐는 대작 《파르치발:Parzival》(1210)을 썼다. 후자는 아더왕 전설과 성반(聖盤) 전설에서 취재한 것으로 특히 유명한 작품이다.(출처 ,두산백과)
 
이제 본격적으로 < 기발한 시골 양반 라만차의 돈끼호테> 첫시간으로 들어가 본다.
곰쌤은 돈끼호테의 기발한 행보 속에서 헤매는 원정대에 이런 말로 길을 열어 주었다.
세르반테스의 화법은 철학적이다. 일부러 모호하게 뭉갠다. 그것이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가지면 특이성이 된다. 돈 끼호테는 기사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봉건영주에게는 기사가 많이 필요했다. 그들은 십자군전쟁 때 많이 죽었다. 세르반테스가 글을 쓸 당시에는 ‘기사도’가 끝났다. 돈 끼호테는 과거의 망령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야기이다. 그 시대는 구술 문화시대였다. 그래서 청각 감각이 열려 있었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은 듣기도 잘했다. 16세기 서양은 완전히 세속화된 세계였다. 기사도에서 귀부인에게 사랑을 바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기독교는 가장 금욕적인 종교인데도 가장 세속적인 사랑을 논했다.
 
돈끼호테는 광기로 일관성있게 살아가는 사람이다.‘상화망동’ 이 하나의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우리 시대에 종말론이나 돈에 미친 사람과 비슷하다. 돈에 미치는 사람은 돈만 보인다. 욕망은 엄청난 집중력이 있어 자본이 축적될 수 있어 자본주의가 나타났다. 동양은 그에 비해 에로스가 없어 세속화, 제국화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 시대의 중년 남성들의 욕망과 비슷하다. ‘살기 힘들다’라는 말은 뻥이다. 먹고 살만한데 평범한 것은 못 견딘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욕망은 유럽에서 시작해 전세계에 불을 지르는 형국이다. 그들이 들어간 아프리카, 아마존에서 원주민들이 욕심 없이 공동체로 사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끊임없이 소비하게 만든다.
기사도 시대는 지났지만 명예와 왕국, 제국건설에 대한 욕망의 패턴은 그대로다. 표상의 세계가 바뀌어도 배치가 똑같다. 우리는 풍속을 바꾸기만 한다. 그리하여 세련되고 구원되었다고 착각한다 돈, 마음수련, 기부, 봉사로 마음을 달랜다. 중요한건 배치를 바꾸는 일이다.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욕망이 있다. 로또로 한 방에 신분상승하고 싶어하고 좋은 차, 좋은 집에 살고 싶어한다. 마치 산초판사가 백작처럼 살며 섬 하나를 다스리고 싶은 것처럼.
 
낭만주의 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전도망상된 것이다. 시인이 되는 것도, 종교도 에로스다. 그런 일들은 순수하게 느껴지게 한다. 마치 컵에 진흙물이 있는데 가라앉힌 뒤 맑아졌다고 착각을 하는 것처럼.
인생의 수레바퀴에서도 바뀐 것 같은데 똑같은 욕망(일)을 반복하고 있다. 서양은 럭셔리한 패턴으로 간다. 낭만주의, 미술, 음악이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도 대리만족하는 큰 욕망의 하나이다. 김희애가 나오는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살려면 격정의 러브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는 격정의 사랑 방정식을 넘어가지 않으면 구원(주체가 되기)되지 못한다. 돈끼호테에 나오는 목동 아가씨 ‘마르셀라’는 결핍이 없다. 남자들이 뭐라고 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너무나 당당하다. 힘의 관계에서 “ 너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어”라는 신호를 보내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스페인  발렌시아에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살았다. 한국사람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열심히 스페인어를 배우러 다녔다. 우리 가족이 시골로 여행하면 그 지방사람들이 신기해서 쳐다봤다. 중국사람들이 와서 스페인말을 하니까.그 사람들은 동양 사람 구분 잘 못한다.
 스페인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 4년동안 살면서 돈끼호테의 지명에 나오는 도시는 거의 다 가 봤다.  하지만  거기서 살때 '돈끼호테'는 그냥 목록에 있는 한 권의 고전이었다. 읽지 않고 라만차의 지방에  놀러 갔다.그때는 풍차도 객줏집도 몰랐다.  만주벌판처럼 넓은 평원에 밀밭이 끝없이 있고 오아시스 같은 마을에서 밥을 먹고 왔다는 기억밖에.  책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말이 맞다.  돈끼호테를 읽고 간다면 많은 부분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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