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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클래식시즌3> 기억이 남긴 기념비, 『 동방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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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파 작성일14-08-22 23:44 조회2,6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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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세계’
 작년에 빼이징에 갔다. 자금성과 이화원을 걸으며 중국의 건물 규모에 놀랐다. 중국인이 우리보다 덩치가 크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런 규모를 생각했을까. 중국을 여행한 사람들은 경복궁이 자금성의 한 칸에 불과하다고 얘기할 때 ‘설마 그럴까 ’하고 나는 믿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묘사하는 13C 몽골대제국을 보면 더욱 놀란다. 누구도 믿기 어렵다. 15세에 아버지, 삼촌을 따라 떠나 26년 만에 돌아와 이야기하는 그가 보고 들은 세계를 고향 사람들이 믿을 수 있었겠는가.
 
  신하와 사신들을 맞이하는 접견실 안에서 6000명 이상이,궁전 밖에서는 4만 명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다. 신년 축하 행사에 10만 마리 백마를 선물로 바친다. 쿠빌라이 칸을 호위하는 1만 2000명의 신하들에게 매년 13벌씩 모두 15만 6000천 벌의 의상을 하사한다.
 
  13세기의 세계
칭기즈 칸이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 내륙 아시아의 교역로를 제압하고, 후계자들이 영토를 확정하여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세웠다. 쿠빌라이의 치세 기간은 34년으로서 그것은 몽골 제국의 어느 군주보다 긴 것이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원대한 안목과 전략가로서의 치밀한 판단력을 겸비했고 군주로서의 역량은 초원의 세계를 넘어 거대한 제국을 운영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시대에는 북방의 극지대에서 남방의 아열대까지 제국 전역을 연결하고 있는 도로와 운하는 역참(驛站)시스템을 타고 마치 혈관처럼 뻗어 있었다. 그 시스템을 따라 선교사·사절·이슬람 상인들이 왕래했다. 몽골인은 문화적 편견이 적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가톨릭교, 경교, 이슬람교, 라마교)가 유입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6차,7차 십자군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시스템을 이용한 상인과 물자의 이동은 주민들에게 번영과 부를 가져다주었다. 쿠빌라이 시대에 시작된 동서 문명의 교류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 동방견문록』은 바로 쿠빌라이 치세의 몽골제국과 그 주변세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이 위대한 시대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기념물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았던 세계, 특히 쿠빌라이 제국의 거대한 영역, 무한한 재화, 거대한 도시들의 실태를 소개할 때 끊임없이 베니스나 유럽의 상황에 비추어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책은 유럽 이외의 좁은 세계에 머물러 있던, 아주 적은 지식밖에 없던 유럽인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것을 ‘허구’가 아니라 ‘진실’ 이라고 믿은 콜럼버스같은 사람들에 의해 유럽은 근대로의 일보를 내딛게 된 원동력이 된다.
15세의 마르코가 이탈리아 베니스(고향)을 떠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지나자 곧 쿠빌라이의 영향이 미치는 몽골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41세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몽골제국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르코 폴로에게 몽골제국은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세계’그 자체였다.
 
  『세계의 서술』의 특징
『동방견문록』의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이다. 마르코 폴로가 자신의 견문을 토대로 여러 지역에 대한 ‘진기하고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 서술할 때 그것을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아시아라 부르는 지역을 어떤 하나의 용어로 지칭한 적이 없다. 그의 글은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과 러시아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서구에서 오리엔탈리즘으로 동양을 타자화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이다. 그들도 봉건제시대, 도시국가로 살아서 다른 곳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개인의 감상이나 흥취(興趣)가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돌아보거나 직접 가보지 못한 세계 여러 지역에 대해 체계적인 서술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세계의 서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그가 누구와 만나서 무엇을 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하는 개인적인 소회(所懷)를 피력하지 않은 것이다.-25p
『열하일기』를 읽으면 박지원이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나고 술은 누구와 함께 마셨다는 세세한 얘기가 일기의 재미를 더했다. 곰샘이 표현한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말이 다른 여행기를 비교해서 읽으면 더 실감을 한다. 박지원의 글이 3차원 3D 입체영상이라면, 마르코 폴로의 글은 개인의 감상이 없어 반찬없는 밥을 먹는 느낌이다.
 현장법사가 쓴 『대당서역기』도 인도로 가는 여정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고 취재했다. Text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여행에 관한 서술법이나 담론이 배치되고 학자들이 첨가한다. 구전되다가『 서유기』 같은 민중들이 즐기는 소설로 만들어진다.
마르코 폴로가 쓴 내용이 사실이냐 픽션이냐 의문이 많다. 픽션이냐를 따지기보다 (그 사람에게) 뭐가 보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시선이다. 본인이 사실을 기록한다고 생각하고 쓰면 사실 기록이고 르뽀이다.
 마르코 폴로는 상인이다. 그래서인지 도시에 대한 설명이 꼭 들어간다. 방위와 거리를 구체적으로 잘 명시한다. 주민들의 특징, 그들의 주식과 생업, 언어, 정치, 그 지방의 물산이나 동식물, 광물을 꼼꼼하게 서술했다. 어떤 내용도 교역을 위해서 필요했을 수 있다. 또 특별이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일행에게 주문했다.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진기한 내용을 잘 보고하라고. 그는 단언한다. 자신이 보았던 놀라운 이야기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죄악이 될 거라고.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의 글 안에는 다른 문화와 관습에 대한 경멸감, 그의 후손들 이 가진 서구문명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문화를 저울질하고 재단하기보다 신기하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35p)
 
 
 제국주의 전에는 사람들은 이유가 없어도 싸돌아 다녔다. 여행은 인간의 본성이다. 상인들은 경계를 넘어 갈 수 있는 곳,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녔다. 그러다 국가차원에서 교역을 하면 힘이 없는 곳은 식민지화된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쳐들어갔지만 통치하지 않았다. 정착민은 제국을 건설하지만 유목민은 각각의 분산된 중심으로 산다. 칭기즈 칸은 정복은 했지만 약탈한 게 별로 없었다. 다뉴브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냥 갔다. 가는 게 그의 본성이었다.
쿠빌라이 칸 시대에는 제국을 건설했다. 정착을 오래하면 썩는다. 유목민은 태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문명을 일으켰다. 원나라가 제국이었다가 기황후 때 망했다. 유목민들은 “아, 끝났구나 ”하며 짐 싸서 다시 초원으로 돌아갔다.
 
마르코 폴로 시대와 지금은 600년 이상의 간극이 있지만 그의 ‘서술’은 생생하다. 눈앞에 보이는 듯한 표현도 많다. 제노아의 감옥에서 마르코 폴로는 경험을 풀어놓고 루스티겔로는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기록했다. 동방견문록은 자금성을 보고 놀란 것 이상의 놀라움이 있다. 경험과 사건은 기억되고 기억은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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