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클래식 3>스펙타클은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븐 바투타 2 세미나 후기 > 세미나

세미나

홈 > 세미나 > 세미나

<로드 클래식 3>스펙타클은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븐 바투타 2 세미나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양파 작성일14-10-23 00:33 조회3,405회 댓글0건

본문

 
                                                    2014년 10월23일 박경옥
spectacle은 굉장한 구경거리나 아주 인상적인 풍경을 의미한다.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정에서 기사이적을 보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진귀한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 동양적 정서로는 섬뜩하고 기괴하고 무서울 정도다. 엽기적인 술탄들이 뿜어내는 이상한 아이디어들로 궁전 앞은 시체로 나뒹군다. 이븐바투타가 인도 궁전을 지나갈 때 말이 움찔 놀란다. 3등분된 몸둥아리의 흉부가 흰덩어리처럼 있다.「쑬퇀은 겸허하고 공정하며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주고 범상찮게 너그럽기는 하지만, 한편 피도 많이 뿌린 사람이다. 그의 문 앞에는 시체가 없는 날이 드물다. 나는 그의 문 앞에서 사람들이 피살되어 버려진 채 있는 끔찍한 광경을 숱하게 봤다.」(115p) 이븐 바투타는 이슬람 종교 법관이다. 그가 만난 이슬람은 자비와 공포가 통치전략인 듯하다. 술탄 왕위 쟁탈은 거의 마피아 수준이다. 마피아보스는 권력을 잡는다. 하지만 제 명에 죽은 자가 없다. 술탄도 마찬가지다. 이슬람의 시아파, 수니파 교주에 해당하는 형제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면 다음 세대는 또 그 복수를 위해 살인을 한다. 죽음은 죽음을 부르고 후손들은 왜 죽이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죽인다. 형벌, 죄에 대한 관념이 동양과 많이 다르다. 유럽은 총을 개발하면서 잔인함을 총에 결집했다. 무슬림은 직접 손으로 했다.(지금도 참수 장면이 인터넷에 나온다)서방 사람들과 무슬림은 숙원이 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어떤 왕은 너그럽다. 너그럽다가 법을 어기는 자가 나타나면 무지하게 잔인해진다. 금(金)에 있으면서 화(火)가 조절이 잘 안 되면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사람이 된다(스펙타클한 사람)고 곰샘은 말씀하셨다. 엄격함이 순환하지 못하면 잔인함이 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치세는 20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후덕한 왕으로서 그의 치적의 하나는 비리는 엄히 다스리되, 피해자는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인도사람들은 모두가 흰옷을 입지만, 피해자는 색깔 옷을 입도록 하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 앉아 있거나 말을 타고 다니다가 색깔옷을 입은 사람만 보면 즉시 안건을 재량(裁量)하여 가해 사실을 가려냄으로써 공정하게 처리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하여 그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51p) 흰옷은 금(金)의 기운이다. 인도왕은 결백증 비슷하다. 워커홀릭이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여자와 폭력으로 심신을 푸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피로사회이고 중독사회이다. 피지배인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면서 경쟁자는 잔인하게 처리한다. 엽기하드코어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븐 바투타가 본 중세는 ‘씹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해버린다. 사회 자체가 잔인성에 대해 대처하는 자세가 다르다. 땅이 넓고 지세가 험한 그 만큼 잔인하다. 넓은 중국은 잔인함의 정도가 우리와 다르다. 우리나라와 죄인을 다루는 자세도 다르다. 풍수학을 문명에 적용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연구가 아닐까.
 
한편, 인간은 아름다움을 위해 저지르는 죄가 너무 많다. 아름다움 때문에 자연이 난개발된다. 크리스마스트리도 한 달 이상 나무에 고문을 하는 짓이다. 어제 패션 tv채널을 우연히 봤다. 이상한 옷을 입고 나오는 모델들의 몸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그건 이미 자연의 몸매가 아니고 대꼬챙이였다. 아름다운 가방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사는 뱀을 얼마나 많이 죽이는가. 옛날엔 수고한 만큼만 볼 수 있었다. 지금 수려한 산엔 대부분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쉽게 보는 것은 잉여가 생기게 만든다.
 
기상천외한 스펙타클은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한다. 종교도 성당이나 사원, 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세 때는 스펙터클하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종교도 교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이치탐구는 멀리 가버린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모든 게 결집되는 종교다. 금기운이 넘친다. 성경은 절대 타인을 인정할 수 없다. 꾸란의 이름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 제정일치의 사회, 종교와 권력이 합쳐지면 더 잔인해진다. 서양 기독교 문명은 철이 있어 총의 기계문명이 지배했다. 이슬람은 피의 전통(정신적)이 계승되었다. 꾸란은 될 때까지 외워야했다. 생활에서 준거틀이 되었다. 막강한 신이며 도그마가 되어 타자들을 인정할 수 없다. 지극한 선이나 지극한 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부처나 예수도 이 법칙을 못 벗어났다. 자비와 관용과 잔혹이 같다. 2500년 전 다신교로 흩어져 있던 인간의 의식에 종교는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말해 줄 수 있었다. 인간은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의미를 잃는다. 종교가 아직도 건재한 이유이다. 현대는 법이 더 촘촘해서 자유롭고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생활을 더 많이 관리당한다. 현대인은 내 것은 지킬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무엇이 될려고 애를 쓰면 업을 짓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애를 써서 스펙터클하게 살고 싶은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