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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 6] 비극의 탄생 17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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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6-05-23 05:32 조회2,2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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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장에서 니체는 비극적 신화를 낳은 디오니소스적 음악과 신화 창조적 힘을 잃어버린 회화적 음악을 비교한다. 학문에 의해 비극이 사라지게 되면서 음악에도 이처럼 구분이 생기게 되고, 이것은 곧 비극적 세계관과 이론적 세계관을 낳는 결과로 이어진다.  

 

비극적 세계관이란 허무적이고 염세적 세계관이 아니다. 개별적 실존의 끔직함을 들여다보게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음악으로 인해 오히려 생존욕과 생존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 비극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위로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니체가 끊임없이 얘기한 몰아 즉, 자기파괴라는 과정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엇다.어쩌면 몰아란 이제까지 자기가 믿고 있던 가치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자기가 알고 믿던 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의 고통, 즉 존재의 심연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몰락을 경험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존재로 변이할 수 있는 도약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몰아란 삶의 의지가 고양된 상태, 힘 의지가 정점에 이른 상태인 것이 된다. 따라서 세상이 말하는 기준이라든지 가치의 척도가 불편하게 다가오고 그 때 비로소 세계는 어떤 힘들이 겨루고 있고 지배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니체는 이런 음악적인 효과의 압도적인 위력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해야만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니체 자신이 비극의 탄생을 쓴 동기가 아닐까. 이렇게라도 해서 근대인들에게 비극의 의미를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비극을 통해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 않느냐는 그래서 철통같이 믿고 있는 가치의 가치를 물어야 하지 않느냐는 니체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론적 세계관은 형이상학적 위로 대신 무엇을 안겨다 주었을까. 여기에는 보상과 자유를 선물하는 방식이 그것을 대신한다. , 고생하고 시달릴 대로 시달렸으니 화려하게 결혼하거나 신의 은총을 받는 방식으로 응분의 보상을 받거나, 자유가 선사되는 노예 검투사가 되는 것 말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삶의 태도가 목적론적으로 변질 될 수밖에 없다. , 은총과 구원을 받기 위해 현세의 고통을 참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신의 자리에 자신이 믿고 있던 이상적 세계, 자신이 떠받드는 학문, 신념을 갖다 놓으면서 기계적 장치의 신을 내세우게 된다. 이것은 자기 존재를 넘어서지 못하고 삶의 출구를 막아버리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서문에서 우리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적으로서 만나기를 원하는 도전적인 용기, 즉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호적수로서 만나기를 원하며 이 적에게서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를 원하는 가장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진 도전자의 용기가 존재하는가?”를 왜 물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또한 니체가 대립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적 소크라테스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명백해 진다. 오히려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비전으로 삼으며 학문을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고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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