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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 서당]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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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경금 작성일13-08-16 16:53 조회2,66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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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고 혈자리 서당 세미나에 입당(?)한지도 어느 덧 세꼭지를 넘어가고 있네요.
침 놓고, 혈자리 배우고, 난이도 높은 책을 읽고 발제하며 머리가 빙빙 돌것 같은 시간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가고 있네요.(정말? ㅋㅋ)
처서와 말복이 지나고 나니 아침 저녁으로는 바람도 선선하니 좋습니다.
한여름의 널부러졌던 원기들을 다시 쫀쫀하게 만들어 책을 열심히 읽고 싶지만,
아직 더위가 다 가지는 않았네요~^^ ㅎ
찐~한 가을을 기다리며 이번주에 했던 세미나를 정리해 보겠습니당~~
   
 
 
7강 나를 버림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지혜
 

1장. 분별과 시비 속에서 깨어 있기
 

   우리 삶에는 연기실상의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나타내는 삶의 네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 네 가지를 살펴보면 제5식인 성소작지(聖所作智)는 시시각각 변하는 각자의 모습대로 우리가 해야 할 일[所作]을 완성[成]하는 함께 하는 삶으로 이끄는 지혜입니다. 이는 제 모습 그대로 완성된 삶을 살면서 관계 속에서 머물면서 깨닫게 하는 작용입니다. 제 6식인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마치 혀가 맛을 정확히 알아차리듯, 만나는 관계 속에서 한 치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며 관찰대상에 대한 바른 통찰을 이룬 지혜입니다. 삶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도 소유가 끼어들지 못함입니다. 제7식인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빈틈없이 깨어 있게 되면 자타를 구별하여 못났다, 잘났다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음을 말함입니다. 제8식인 대원경지(大圓境智)는 자기의 삶을 회복하고 평등 속에서 자타를 구별하지 않고 깨어 있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진정한 삶을 말함이다. 이 네 가지는 따로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17.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는 것은 모두 식의 전변에 의한 것으로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오직 식일 뿐이라고 합니다.
 

18. 일체종식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전변하며, 전전력 때문에 가지가지 분별이 생깁니다.
 
   소멸은 앎이 없어진 것이며, 생성은 현행의 앎이 일어난 것입니다. 현행 때마다 중생은 주관[分別]과 객관[所分別]을 분리시킵니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앎이 있게 됩니다. 앎의 변화를 식의 전변轉變이라고 합니다. 앎은 분별과 소분별이 관계하면서 변화하는 하나의 장으로, 분별과 소분별이 앎 속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앎을 떠나서는 분별도 소분별도 없습니다.‘왜곡되어 나누어진 일체의 분별력’을 제8식의 이름 중 하나인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전변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면서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힘 때문입니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어 변화의 원인이 되는 힘을 전전력이라고 합니다.
 
 

2장. 길을 잃은 사람
 
19. 모든 업습기가 이취습기와 함께하기 때문에 앞의 이숙이 다하면 다음 이숙이 생깁니다.
   분별[能取]과 소분별[所取]을 이취二取라고 하고, 중생의 분별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 자신과 타인으로 이원화시킨 것이 이취습기二取習氣하고 합니다. 분별과 소분별로 나누어 일어나는 선악시비와 갈등으로 업습기業習氣가 점점 자라게 됩니다. 습기란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는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삶에서 매순간 깨어 있지 못하면 분별과 선악시비의 모습을 끊임없이 이어가게 만듭니다. 1장에서 말한 네 가지 지혜가 진정한 삶의 모습이지만, 삶을 분별된 모습으로 왜곡시켜 잘못 보는 경향으로 현행의 습관을 이어가는 것을 이숙異熟이라고 합니다. 이숙에 의해서 우리 삶이 끊임없이 분별과 소분별로 왜곡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깨달음의 길을 잃은 사람을 말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관찰하고 생성과 소멸을 명확하게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한 생각을 일으키고 한 발짝 뛰는 속에서 깨어 있는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삶을 여실히 보게 되는 변화를 전의, 곧 의지처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시비분별이 생겨 깨달음에서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모습이 몸과 마음을 버려야 할 대상이나 탓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분별과 선악시비를 깨어 있음과 마음챙김으로 바꿔가는 것이 불도입니다. 분별과 소분별의 전이숙(전생)이 떠오르면 다시 의(우리의 삶을 나와너, 저것과 이것으로 분별시키는 힘)의 작용에 의해 분별되어 선악으로 흘러가는 것이 후이숙(금생)입니다. 전이숙이 떠오른 것을 생이라 하고, 전이숙이 멸해서 후이숙으로 갈 때 공간이 한 번 비는 것을 멸이라고 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생이라고 하고, 한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멸이라고 한다. 전이숙에서 후이숙으로 흐를 때, 그 내용이 매순간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뀌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업습기와 이취습기의 속성입니다. 깨어 있음의 흐름은 참된 길로 가는 것이고, 분별의 흐름은 중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한 찰나의 흐름에 분별 또는 깨어 있음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상태가 모두 식입니다.
 
 

여러분은 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
저는 보통 복이라고 하면 좋음이나 행운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정화스님이 복에 대해서 말씀 한 것을 보니 복은 막힘없는 따뜻한 기운이라고 하니 색다르게 보아졌습니다.
복을 줄 때 나의 마음 준비부터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이란 무엇입니까?
 

‘막힘없이 흐르는 맑고 따뜻한 기운’이다. 막힌 마음은 분별과 선악시비로 나타나며,
또한 막힘이 있으면 삶이 왜곡된다. 이 막힘이 분별이다. 내 마음을 열어 놓지 못하면,
대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열린 세계에서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파악하면 따뜻한 기운이 교류된다.
열린 마음과 이 따뜻한 기운이 복이다.
마음을 열어 따뜻한 기운으로 손을 잡아주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게 된다.
마음을 여는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열린 기운들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게 되어
색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
 
 

 
 
한 눈에 딱 들어오게 개운하게 정리하고 싶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네요.^^;
다음 발제자는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에 류시성샘,
                    <의학이란 무엇인가?>에 강지윤샘 입니다.
8월 21일에 가뿐한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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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지난 주 정화스님 책을 읽고 난 후 욕망에 대해 생각했지요. 욕망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줄 아는 것이 태어나면서 부여된 욕망을 생생하게 살리는 거라고 느꼈지요. 움츠러들지 마세요.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눈치보지 마세요. 나를 풀어줘야 뭐든지 풀립니다. 그래야 가뿐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