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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서당]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3강 삶의 소외와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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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얼음마녀 작성일13-07-18 00:56 조회3,03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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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강은 붉은 장미는 붉은색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붉음이라는 것은 장미의 삶에서 분리되어 나온 한 측면일 뿐이고, 그 안에도 여러 가지 다른 색들이 섞여 있는 것을 붉다’는 말로 그 질적 차이를 제거하고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을 절단하고 구별하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규정한다. 언어화의 과정은 다름을 분별해나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눈으로 보아서 인식할 때, 이것을 분별하여 눈은 눈의 경계(안계), 색은 색의  경계(색계)
  타자화된 관계로 설정하고, 눈과 색 사이에서 일어나는 앎(마음)은 별도로 안식계라고 분리하여 생각하곤 한다.
  나와 대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눈은 눈대로, 색은 색대로,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안식은
  안식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계()라고 한다.
 
  장미를 보는 눈(안계), 장미의 색(색계)과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안식계)을 구별하여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장면의 모습일 뿐이다. 경계는 소외를 만든다. 이렇게 경계를 확연히 구분지으면 타자화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긴장관계가 일어난다. 타자화된 삶의 소외가 개인과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사회가 만족스럽지 못한 삶으로 빠져 버린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나는 잘났다, 너는 못났다라거나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는 의식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 상태는 이런 분별과 소외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에는 마음을 쉬어야만 한다. 마음을 쉬려하는 것이 수행의 입문이다.
 
 아와 법, 유무의 대립이 없어져 가면서 법화의 절대 타자화가 사라지는 것을 공()이라 부른다. 분별과 소외는 긴장과 불안을 낳는다. 우리에게 긴장감이 생기면 몸의 한 부분이 차가워져서 그 부분이 아프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병들면 사회의 어느 부분이 차가워져서 타인을 차갑게 대하게 된다. 이런 감정이 긴장을 높이고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 분별에 의해 규정(법화)되고 세력화되고 긴장시켜 차갑게 만드는 힘이 없어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힘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공()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무()나 허()가 아니다. 분별과 단절이 없는 흐름, 즉 연기실상이 공()이다.
 
 유식의 수행법인 사심사관은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 사물()과 이름과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自性)과 각각의 차별(差別), 이 넷은 단지 임시적 존재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깊게 관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문자로 고정화된 것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하여 고정화로부터 벗어나 변화 속에서 삶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은 먼저 마음의 긴장 관계를 풀어 줘야 한다.
 
  마음 속으로 '평온해지기를, 관대해지기를, 따뜻해지기를'하고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머리 속에 한 획 한 획  글자를
  써가면서 '부드럽고 따뜻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꿔 가는 것'을 연상한다. 그렇게 하면 자량이 커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축원을 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연상화, 대상화시켜서  강물이 흘러서
  바다를 이루듯, 기운 달이 차서 둥근 달을 이루듯, 하시는 일을 모두 이루시고, 편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축원한다.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떠올려 축원하고, 그 다음 자기와 제일 가까운 사람부터 차례로 떠올려 축원하고 마지막에는 미운 사람도 떠올려서 축원을 해준다. 이렇게 하는 동안 적대감이 사라지고 자비심이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자비심을 일으키려고 해도 자기 내부에 자비심이 형성되지 않으면 이 마음을 기를 수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자신에게 부드러워지고 평온해지면서 평등한 마음이 일어나면, 저절로 다른 사람에게 그 마음이 가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것 같지만,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며,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범주 속에 갇혀 있다. 자기가 이해한 범주 속에서는 사랑과 이해가 있을지 몰라도, 그 범주만 넘으면 미움과 외면뿐이다. 지금까지 훌륭한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지만 혼란이 심해지는 것은, 중심에 있는 개개인의 의지작용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수행해야 하고 외부의 연을 그렇게 흐르도록 바꿔야 한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훈련을 하는 것이다. 경전 등을 공부하는 것은 왜 우리가 자기훈련을 해야 하는가하는 것을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유식을 배우는 것도 자기 훈련을 하기 위해서이며, 훈련된 만큼 너그러움을 알게 된다. 자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유식을 배운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있어서나 몸과 마음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 몸을 잘 다스리는 것은 정신훈련을 하는 것과 똑같다. 삶의 진실을 보는 집중력을 키우는 것이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며,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첩경이다. 유식성이란 현전하는 부처, 곧 우리들 자신들로서 우리 자신이 못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은 잘났고 나는 못났다, 나는 잘나고 다른 사람은 못났다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참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은 활동하는 매순간마다 그대로 깨어 있는 부처님 자신이며, 유식성이다.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것과 자기 자신의 깨어 있음에 예불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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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분별과 경계를 만들어내는 생각의 그물에 갇혀 차갑게 굳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이 수행이네요. 
 
전 오늘부터 잠자기 전에 
강물이 흘러서 바다를 이루듯, 기운 달이 차서 둥근 달을 이루듯,
하는 일을 모두 이루고, 편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차례대로 축원하는 걸 시작하려구요.  
나를 따뜻함으로 채우다보면 그 따뜻함이 자연스럽게 그 다음 스텝,  또 다른 변화의 동력이 되어 줄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다음주  발제는 강지윤샘이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4강', 류시성샘이 '의학이란 무엇인가 31~41강' 해오시기로 했습니다.  
아~ 다음주에 효진샘이 혈자리서당 2학년 연재를 시작하는 글을 써오기로 했구요. 전 다음 글 자료조사해오기로 했군요. ㅎㅎ 
  
 
 
댓글목록

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이제 유식성이 몸에 조금씩 붙는 건가요?
처음에 난감하던 불교용어들이 익숙해집니다.
제8식과 아뢰야식, 이숙식, 사심사관 등등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쓰는 일상용어를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협력관계, 연기관계에 있지 주종관계가 아니다.
'이롭게 한다'는 말은 긴장관계를 해소시켜서 평정하게 한다, 평상심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하필왈리가 아닌 게지요.
'앎이 있는 곳'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본 것에서 만들어진다. 지금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있는 식장 속에서 일어나는 식의 변화일 뿐이다.
'청정하다'는 그냥 맑고 깨끗하다가 아닌 게지요. 지난 2강에서는 이것을 주관과 객관이 하나된 상태라고 했는데 3강에는 유식성이 드러난 상태, 이루어진 부처를 말하더군요. 개념의 변주를 느껴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3강에서 눈과 색이 작용할 때, 의의 분별작용에 의해 눈은 눈대로 색은 색대로 실체화되면서 서로 단절된다고 했을 때
모든 감각을 조합하여 무한을 펼친 보르헤스가 생각났어요. 잃어버린 비가시적 세계를 다른 감각들의 조합으로 무한하게 만들어 내는 능력이 보르헤스의 진면목이었지요. 그것이 그를 구원했구요.
불교가 주는 이 충만함, 무더운 여름날 한줄기 소나기처럼 퍼붓습니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