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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푸.들 세미나] 아침놀 4권 1주차 씨앗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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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디아 작성일13-07-30 11:46 조회3,1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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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비공식 자격으로 운 좋게 니푸들 세미나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 나디아입니다.
흐흐. 처음 씨앗 문장을 올려보네요.
 

4권도 1,2,3권처럼(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낄낄) 허를 찌르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무릎을 탁 치게 하고, 나도 그랬나? 하면서 곱씹게 만드는 니체의 지적들. , 씨앗 문장 들어갈게요.
 

우선 첫 번째 씨앗 문장입니다.
 

210. 그것 자체’ : 그 자체로 선한 것,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그 자체로 고상한 것,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우리 외부와 내부의 사물들에 이러한 말을 부여하게 되는 영혼의 상태는 존재한다고.
우리는 사물들의 술어(述語)를 되찾았다. 또는 적어도 우리가 술어를 사물들에 빌려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이러한 통찰 때문에 우리가 보다 더 부유하고 보다 더 탐욕스럽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자.
 

니체는 인간이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물에 말을 부여하는 것을 두 가지로 표현했네요. 술어를 사물에 빌려 준다 혹은 사물들의 술어를 되찾았다. 사물에 끊임없이 술어를 부여하긴 하지만, 술어를, 그 속성을 가지지 않은 사물에 라벨처럼 붙여주는 건지(빌려주는 건지), 아니면 사물이 이미 가지고 있던 속성이 발굴되어 술어가 발견되는 건지(되찾아지는 건지) 확실하지 않으니, 사물에 언어를 부여하는 행위를 두 가지로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통찰로 더 부유하고 탐욕스럽게 되지 않았다는 건, 제 생각에, 통찰이 일어났음에도 사물에 부여하는 언어가 더 풍성해졌다든가, 더 새로운 언어를 붙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혹은 우리가 술어를 사물에 부여하는 활동에서 더 진화된 언어활동을 시도한 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211.영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기독교적인 인내 이상의 인내로 그대들을 지금까지 견뎌온 것처럼 그대들을 영원히 견뎌내야 할 모든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영생하는 인간이 오직 하나만 있어도 여전히 이 지상에 있을 모든 다른 것들은 그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죽고 싶고 자살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영생에 대해 꿈꿔본 적도 없지만, 영생에 대한 생각이 싹 사라지네요. 저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런데 궁금했습니다. 영생하는 인간에 대해 도대체 어떤 혐오감이 들까요? 우선 시한부 환자 혹은 병자들 혹은 재벌 같은, 생에 미련이 많을 법한 분들은  부러움에 치를 떨 것 같습니다. 만약 영생하는 인간을 숙적으로 두고 있는 사람은, 살인 충동이 들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생로병사의 과정을 지켜 볼 수 있다면, 작은 연민이라도 느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생각해보니, 영생하는 인간은 생로병사의 흐름을 따르는 자연과 인간과 아무 교감을 못하는 암세포 같은 존재이겠네요. 마치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 사이에 느닷없이 쇠꼬챙이가 턱 걸린냥, 모든 흐름을 파괴하고 마는, 그런 존재. 다른 원리와 기운을 가지고 사는, 영생하는 인간은 주위 사람과 자연과 전혀 감응하지 못한 채, 생로병사로 인한 고뇌와 배움을 체험하지 못한 채, 그 스스로도 엄청난 고독과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215. 희생 동물들의 도덕: 그대들은 그대들의 희생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저 강력한 존재가 갖는 힘의 느낌에 탐닉한다. 사실 그대들은 단지 희생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오히려 그대들은 마음 속에서 그대들을 신으로 변화시키고 신이 된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요컨대 그대들은 도치와 과도함을 원한다.
 

 이부분도 재밌었습니다. 희생을 통해 힘을 느낀다는 건 어떤 걸까요? 내던지는 내내, 자기를 던지게끔 만들고 계속 던지게 끌어당기는 힘을, 온 몸으로 체감하는, 숭고하고도 짜릿한 느낌일까요? 재밌는 건, 희생하는 사람은 힘을 느끼며 이 과정을 즐기지만, 다른 사람에겐 이게 고귀하고도 엄숙한 희생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전 이 글을 곱씹으며 이슬람교의 수피즘을 떠올렸는데요. 수피주의 신도들은 돌고 도는 회전춤을 반복해서 추면서 무아의 경지에 올라, 신과 합일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회전춤을 통해, 신과 합일되는 게 아니고 신으로 자신을 변모시켜 신이 된 자신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218. 자신의 약점을 예술가처럼 처리하는 것.: 나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예술가적인 힘, 즉 자신의 약점을 통해 자신의 덕을 오히려 두드러지게 할 줄 알고 자신의 약점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덕을 열망하게 만들 줄 아는 힘을 갖기를 바란다. (...) 그들(베토벤, 모차르트, 리하르트 바그너)은 모두 그들의 약점을 통해 그들의 덕에 대한 갈망과, 정신의 아름다움과 선의(善意)의 그 모든 울림에 대한 열배나 민감한 혀를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씨앗문장에 소개할, 나폴레옹의 얘기를 떠올리게 하네요. 이 부분을 얘기할 때, 제 기억으로는 누군가 고미숙 선생님의 다음 말을 거론한 것 같습니다. “무너지기 위해 쌓는다.” 니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추락하는 것을 강조했었죠. 아무튼 각 예술가들의 약점이 분명하게 표현된, 그래서 참 가지각색인 음악을 통해, 우리는 독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들의 덕을 갈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베토벤의 거침과 모차르트의 쾌할함과 바그너의 불안함을. 약점이 음악을 통해 숭고하게 표현되어서 일지도 모르죠. 그렇습니다. 세 음악가들은 약점이 극대화되어 표현된 음악을 통해, ‘이런 것’(약점)도 위대한 정신임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선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셈입니다.
 
  219. 겸양에 깃들어있는 기만: 그대는 그 앞에서 그대를 비하하고 그대의 사려 없는 행동을 그로 하여금 경멸하게 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렇게 가혹하고 매우 힘든 상황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 근본적으로 그대는 그 장면을 그대 앞에서 그대 자신을 위해 상연한 것이다. 그대가 그러한 장면에 증인을 초대한 것 역시 그대 자신을 위해서이지 그를 위해서는 아니다.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이 부분은 참 통쾌했습니다.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을 때, 그 사람에게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사죄하는 게, 생각해보니, 를 위해서였네요. 마치 내가 상실한 명예가 그대로 그 사람의 행복으로 치환되는 냥. 결국 이것도 새로운 상처가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223.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눈. :예술가들과 시인들과 작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은 기만을 꿰뚫어 보는 눈이다. (...) 그 눈은 그들이 다수를 위해 소수를 팔고자 할 때, 그들이 그들 자신은 고양되지도 않았으면서 고양하려 하고 장식하려 할 때 이러한 의도를 간취할 수 있다. (...) 즉 그들은 그 사상이 그들을 무엇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 자체가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잡아 늘이고 축소하며 색칠하고 싸감고 양념을 쳐야 했던 재료로서의 일상적 사상임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 이 붉어진 얼굴을 숨긴 채 그 얼굴 붉힘을 그대들 자신에게 재해석하고자 하는 그대들의 술책을 잘 알고 있다. 
 

 이 부분은 글을 쓰는 사람이면 다 뜨끔할 것 같네요. 물론 저도. 특히 사상에 대해 말한 부분은, 어떤 사상에 기반 해, 특정한 사건 혹은 세상을 해석할 때 많이들 그러죠? 논리적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잡아 늘이고 축소하며 색칠하고 싸 감고 양념을치곤 합니다. 또 글의 논리가 애매하고 다소 부족할 경우, 보통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지 않나요? “내가.......하게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함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이런 게 바로 얼굴 붉힘을 또다시 재해석하고자하는 술책 아닐까요?
    
 228. 칭찬 속에 깃들어 있는 복수심: 여기에 찬사로 가득 찬 페이지 하나가 있다. (...) 그러나 이 찬사 속에 복수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그대들은 그것을 극히 정교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 그렇게 정교하고 풍부하며 독창적인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의 복수심이다.
   

이것도 참 재밌었습니다. 과한 찬사 속엔 복수심이 숨어 있었다니. 하긴 너무 과도한 칭찬을 들으면, 오히려 민망하거나 저럴 정도는 아닌데, 라고 의심이 들곤 했습니다. 은연중에 복수심을 느낀 건지도 모르죠. 그리고 마지막 말, 찬사가 풍부하고 독창적일 경우 찬사하는 사람이 독창적인 게 아니라, 복수심의 에너지가 독창성을 끌어올려준 것이란 해석이 재밌네요.
    
 235. 감사를 거절하다: 사람들은 간청을 거절해도 되지만 감사를 거절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깊은 모욕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이 부분은 풍부한 토론을 불러왔습니다. 왜 감사를 거절하는 게 모욕감을 주는 건지. 씨앗문장을 쓰면서 생각이 든 건 이렇습니다. 간청은 무언가 받기 위해 타인에게 요청하는 거죠? 자신은 무언가를 내 주는 게 아닌. 그럴 때 거절당하는 건,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잃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감사는 자신의 마음을 내미는 겁니다. 고맙다는 마음. 무언가를 내 준거죠. 그런데 그걸 거절하면 자신이 내준 무언가가 걷어차이는 꼴이죠. 그래서 모욕감을 느낀 게 아닐까요? 이 부분을 얘기하며 얻은 수확은, 사실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요즘 너무 감사하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는 부분에 다들 공감하면서, 감사하다 미안하다란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쓰자는 말을 했습니다. 혜경 쌤 말로 고미숙 선생님은, 선생님에게 누군가 어떤 호의를 베풀었을 경우, “이제부터 널 자주 써먹겠어.” 등등 투덜대는 말투로 감사함을 표현하신다죠? 그리고 예전에 할머니는 손자에게 먹을 걸 줄 경우, “도저히 못 먹겠다. 너나 먹어라.”라는 말로, 손자가 신경 쓰이지 않게 먹을 걸 건넸다는 말도 기억납니다 정중하진 못해도, 사람사이를 더 유쾌하고 청정하게 만드는 언어표현을 많이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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