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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서당-시공간> 不可知, 그러나 덤덤히 받아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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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밝을曉 작성일13-06-20 01:48 조회2,74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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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함께 읽은 부분은 정화스님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2강- 총체적인 흐름의 세계였다. '식' 가운데 '제 8식'을 공부했다. 그것은 인식대상이 되는 종자와 몸, 세계와 인식주체가 함께 관계하여 연기실상으로 우리에게 드러난 총체적인 세계! 하지만 책에서 언급되었듯(물론 다른 맥락이지만), 제8식은 "앎의 행상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으며, 苦受도 樂受도 아닌 덤덤한 받아들임(捨受)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8식"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책을 몇 번을 읽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으니... 그러니 당분간 큰 흐름(?)을, 그러니까 진도를 묵묵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이번 장에서도 낯선 불교 개념들이 예고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했다 사라졌다. 다시 적어보자면, 근과 경, 견분과 상분, 종자, 유근신, 기세계, 이숙식, 사량식, 요별경식, 아뢰야식, 일체종식, 전 6식, 7식, 8식, 촉, 작의, 수, 상, 사, 5변행심소, 고수, 낙수, 사수,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 아라한, 일법계 등등..... 세미나 시간엔 주로 개념에 대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종자'에 대하여, '경향성'에 대하여, 수행오위에 관하여, 앎과 만나는 법에 관하여. 이 이야기와 개념들이 앞으론 내 입에서 헛돌지 않길 바라며, 비교적 친숙했던 문장들을 덧붙인다.
 
앎은 근, 경의 변이를 감촉하여 알아차리면서(觸) 그곳으로 마음이 기울게 하여(作意) 그것을 받아들이고(受), 받아들인 것이 한정된 어느 것으로서의 형상임을 규정하면서(想) 마음이 그것을 같은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며, 의근(意)이 움직여 그 상을 취하는 작용(思)인 다섯 가지 심소와 항상 같이하면서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제8식에서는 앎의 행상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으며, 수도 고수나 낙수가 아닌 덤덤한 받아들임일 뿐입니다. p74

삶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연기실상으로 살려는 노력이 수행입니다. 삶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의 가치판단이나 판단의 근거로부터 스스로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들을 그대로 지켜봐야 합니다. 그대로 지켜만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탐진치로 인하여 소외되어 나타난 고, 즉 '소유의 형태로 있는 마음의 흐름을 알아차리면서 그 흐름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p68

이때 중요한 것은 소외시킨 분별의식에 동요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혹은 걸으면서 거기에 일어나는 '나와 나의 소유'를 집착하는 힘을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흐름을 보게 되고 흐름 속에서 '아와 법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p68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사량이 창조적인 힘으로 작용하여, 총체적인 삶 속에서 서로 다르게 제 모습을 키워 나가게 됩니다. 나를 전체에서 소외시키는 사량분별이 사라진 것이므로 평등성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은 총체적인 삶 속에서 사량이 유리되어 있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이 얽혀져 있는 가운데서도 제 모습을 키워 갈 수 있는 힘으로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p63
 
* 그 밖의 전달사항
- 에세이 주간을 맞이하여 세미나는 2주간 쉬기로 했고, 7/10(수)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 다음 발제는 박경금 샘(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3강), 최정옥 샘(의학이란 무엇인가: 30장까지)
- 다들 에세이를 덤덤히 받아들이시길. *^^*
댓글목록

박경금님의 댓글

박경금 작성일

베르그샘의 책보단 좀 낫겄지 했지만 역시나 어렵군여 -..-;;
단디한 근육을 만들기란 쉽지 않은듯..그래도 힘 불끈! ㅎㅎ
고생했오~그나 3강 발제는 나 아니고 얼음마녀라는~~^^;

예진님의 댓글

예진 작성일

에세이를 덤덤히라 ㅋㅋ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아! 어려운 부분 발제하느라 수고 많았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