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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그몸 세미나] 남방의사, 주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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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6-26 16:39 조회3,7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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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성입니다. 지난 시간에 <중한그몸>에서 공부한 내용은 금원사대가 유완소, 이동원, 주단계와 명나라 약물대왕(?) 이시진의 삶과 의학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주단계였는데요. 이제 너무 많이 써먹어서 뭐라고 말할 내용이...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하여 제가 씨앗문장으로 쓴 건 예전부터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걸 했습니다. 주단계의 주저인 <격치여론>의 챕터를 써보는 것인데요. 주단계의 저서를 직접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단계의 생생한 언어를 들려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한 가지 더! 지난 세미나 말미에 제가 제안했던 것. <동의보감>의 한 챕터를, 가령 <신형장부도> 첫 머리에 나오는 손진인과 주진형의 글이 실린 챕터를 이런 식으로 써보면 어떨까해서 입니다. 아니면 이런 형식으로 발제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글을 쓰는 것이 벅차다면 이렇게 인용을 하고 이 챕터를 어떤 사유와 연결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이 문장들을 가지고 어떤 글, 어떤 현장 혹은 어떤 사건과 연결해서 쓸 수 있을 지 등등 메모형식으로 가져오고 토론하는 방식은 어떨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실행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렇게 쓰려고 노력해보았어요 ㅋㅋ 그리고 지난 시간에 했던 내용은 발제문을 첨부파일로 올려두도록 하겠습니다!!^^
 
 
식색(食色), 달콤 쌉싸름한 유혹
 
음식색욕잠서(飮食色慾箴序)
전(傳)에 이르기를, 음식(飮食:食慾)과 남녀(男女:性慾)는 사람의 크나큰 욕망이라고 하였다. 내가 늘 이것을 생각해 보건대 남녀의 욕망은 관계되는 것이 심히 크고, 음식에 대한 욕망은 신체에 대해 특히 중요하며, 세상에서 그 속에 연이어 빠지는 자가 적지 않다. 만약 도(道)에 뜻을 두면 반드시 먼저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음식, 색욕 두 잠(箴)을 만들어 제질(弟姪:제자들과 조카들)에게 알리고 여러 동지에게 말한다.
 
음식잠(飮食箴)
사람 몸이 귀중한 것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이기 때문이다. 입 때문에 몸을 상하는 사람이 세상에 그득하다. 사람이 이 몸을 지님에 기갈(飢渴:배가 고프고 목이 마름)이 연거푸 일어나니, 이에 음식을 만들어 그 삶을 이어 나간다. 저 우매한 사람을 보면 구미에 따라 오미를 지나치게 섭취하니 병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병이 생기는 것은 그 기미가 지극히 미소하지만 군침이 돌아 이끄는 대로 먹다보면 문득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병이 생기게 되고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니,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의사를 찾고 기도를 드리는 등 온갖 짓을 다 하게 된다. 산야의 빈천한 사람들은 담박한 음식에 익숙하고, 동작을 쉬지 않으니 그 몸이 또한 편하다. 다 같은 기운과 체격을 타고났으되 유독 나만 병이 많은가 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한 번 싹트면 티끌이 걷히고 마음의 거울이 깨끗해진다. 그러므로 ‘음식을 조절하라’는 것은 『주역(周易)·이괘(頤卦)』의 상사(象辭)이고, ‘조그마한 입을 기르려다 큰 몸을 해친다’는 것은 『맹자(孟子)·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의 가르침이다. 입은 병을 생기게 할 뿐 아니 너의 덕까지 망칠 수도 있으니, 입을 병마개처럼 막아 탈이 없게 하라.
 
색욕잠(色慾箴)
오직 사람이 태어남이 천지와 어우러져 유순한 도(坤道)는 여자를 이루고, 강건한 도(乾道)는 남자를 이룬다. 남녀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면 생육의 임무가 맡겨지니, 혈기가 왕성할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예(禮)에 따라 결혼하여 교접을 때에 맞추어 한다면 부모 자식이 서로 친애하는 정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저 우매한 자들을 보니 감정에 따라 욕정을 부려서 오직 만족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조독(燥毒)이 있는 최음제를 쓰고 있다. 기(氣)는 양(陽)이고 혈(血)은 음(陰)인데, 인신(人身)의 신(神)은 음이 평안하고 양이 간직되어야 몸이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혈기가 얼마나 되기에 스스로 아끼지 않고, 내 몸을 살아가게 하는 정(精)으로 도리어 내 몸을 해치는 적(賊)이 되게 하는가? 여자가 탐함이여, 그 욕심은 실로 크도다. 여자가 정숙해야 집안이 화합할 것이다. 남자가 탐함이여, 그 집은 절로 망하게 되도다. 덕을 잃을 뿐 아니라 몸도 여위게 된다. 색욕(色慾)을 멀리하면 음탕한 마음이 없어지며, 음식이 달아 몸도 편안해지고 병도 낫는다.
 
-『격치여론(格致餘論)』
 
주단계의 대표작 『격치여론(格致餘論)』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4언절구의 형식으로 쓰인 이 글은 보고만 있어도 재밌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식색(食色)의 욕망만큼 강한 것이 없었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어서다.(--;) 먹는 것과 남녀의 운우지정(雲雨之情). 생명은 여기서 나고 그 힘으로 길러진다. 동시에 그것에 의해 병들고 죽는다. 식색(食色)에 생사(生死)가 같이 있는 셈이다. 이건 큰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원래 좋은 것, 원래 나쁜 것은 없다는 깨달음. 자성(自性)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부처는 이 깨달음을 발판으로 삼아 구도(求道)의 길을 가고자 했다.
 
먹는다는 것은 천지의 기운을 먹는다는 뜻이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음양의 짝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것이 생(生)이자 명(命)이다. 동양은 오랫동안 이 생명관 위에서 삶을 조망했다. 생명은 천지자연의 명(命)을 받아 살아간다(生). 흥미로운 것은 그 명(命)의 세부항목들이 없다는 점이다. 천지의 운행과 생명의 흐름이 같다는 것 외엔 구구절절한 원칙들이 없다. 천지와 생명 사이라는 빈 공터를 남겨둔 생명관. 동양의 사상들은 여기에 터를 잡았다. 의학도 마찬가지였다. 천지에 의해 생겨나고 길러지고 병들고 죽는 몸. 이 몸을 통해 동양의학은 천지와 생명이라는 두 키워드를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몸은 예절(禮節)을 원한다. 나는 이 예절이 천지의 운행을 닮으려는 생명의 지혜였다고 생각한다. 예(禮)란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며, 절(節)이란 마디를 넘어 흘러넘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때에 맞게 적절히 하는 것. 천지가 봄여름가을겨울에 맞는 생명을 낳고 기르고 죽이듯이 하는 것. 그 원리를 천지자연과의 접속뿐만 아니라 인간사에도 적용하려고 했던 것. 나는 이것이 예절이었다고 생각한다. 옛 선비들은 이러한 예와 절을 지키는 것을 중용(中庸)이라고 불렀다. 또 ‘칼날 위에 선 상태’라고도 불렀다. 그야말로 무속인 뺨치는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중용을 이러한 상태라고 규정했는가. 중용이란 중(中)을 항상(庸) 한다는 뜻이다. 시중(時中), 때에(時) 맞게(中) 함을 늘(庸) 추구한다는 것. 이때 때에 맞게 하려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그 때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무엇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고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그 관계망 속에서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길이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을 매순간(時) 제기하는 것이 중용(中庸)이었다. 선비들은 칼날 위에 선 것처럼 깨어있어야, 그 정신으로 현실을 봐야 이 중용의 길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늘 훈련했다. 거경궁리(居敬窮理). 몸가짐을 살피고 천지의 이치를 탐구하라. 칼날 위에 선 것처럼!
 
몸은 그 탐구의 한 가운데 있었다. 몸은 말썽을 부리기도 하고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간혹 중(中)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비들은 그 몸을 스스로 살피고 예(禮)와 절(節)에 맞게 조율하면서 천지와 생명의 합일을 몸으로 체득(體得)하고자 했다. 봄엔 봄에 맞는 마음과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으로 몸과 천지의 어떤 간극도 없는 대자유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했다. 물론 모두 그 공부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 길(道)에 너무나도 빨리 도달하고 싶어서 병이 나기도 하고 그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에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대유학자 퇴계 이황 또한 젊은 시절 그와 같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4174) 빨리 가지도 느리게 가지도 않는 길(道). 우리는 빨리 가려고 할 때, 더 많이 얻으려고 할 때 거기에 매여 고집스러워진다. 느리게 가려고 할 때,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때 안이하고 방종하게 된다. 결국 밀당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이 기술을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것. 그렇기에 유학자들은 몸을 그 입구로 생각할 수 있었다.
 
주단계는 식색(食色)의 욕망 또한 이 구도를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욕망들이야말로 그 길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병이란 욕망을 따라가다가 마주치는 벽이자 한계다. 더 이상 가면 죽는다. 정지! 멈춤! 이 길은 몸이 원하는 길이 아니다. 주단계는 이 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치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근본적인 처방은 늘 간명하고 반복적이었다. 어떤 환자에게든 생활의 절도(節度)를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음식과 남녀의 욕망 앞에서 예(禮)를 회복할 것을 주문했다. 상황에 맞고 시절에 맞게 살 것. 중용(中庸)을 니 몸뚱아리로 체득할 것. 병은 그 앎을 가르쳐주는 선생이라는 것. 그러나 이 처방을 지키지 않아 죽음에 이른 환자들이 『격치여론(格致餘論)』 곳곳에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 처방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의 숙부는 형색이 모두 실(實)하고 해학(痎瘧)과 이질을 겸했는데 강건하고 식사할 수 있음을 스스로 믿어 절대로 거리낌이 없었다. 하루는 나를 불러 말했다. “나는 비록 병이 있지만 건강하고 먹을 수 있으며 오직 땀이 나는 것이 괴로운데, 네가 이 땀을 멎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말했다. “해학은 땀이 나오지 않으면 나을 수 없으며, 우려되는 것은 바로 건강하고 식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질이 아닙니다. 위(胃)가 열하고 잘 녹이고 비가 병들어 화(化)하지 못하니 식적과 병세가 이미 심합니다. 이 때 음식을 절제하고 선택하여 위기(胃氣)를 기르고 출입을 줄여 풍한을 피하고 땀을 철저히 내면 낫습니다.” 숙부가 말했다. “세속에서 배불러서 죽은 이질이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지금 먹을 수 있는데 왜 우려된다고 하는가?” 내가 말했다. “이질에 걸렸으나 먹을 수 있는 자는 위기(胃氣)에 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지 마음대로 먹고 절제, 선택하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따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잔뜩 목마르면 또 과일을 먹었다. 이처럼 하고 1개월 남짓 지난 다음 비록 치료하려 하였지만 손을 댈 수 없었고, 계속 그대로 지내다가 또 1개월 정도 지나서 죽었다. 『내경』에서 교만하고 방자하여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불치의 병이라 하였는데 확실하다.

-『격치여론』, 「대병불수금기론(大病不守禁忌論)」
그가 「음식잠」과 「색욕잠」으로 책을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생명의 원초적 욕망을 스스로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만약 도(道)에 뜻을 두면 반드시 먼저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 앞에서 먼저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 입구는 참으로 보편적이면서 깊다. 먹고 사랑하는 일. 이 원초적 욕망의 길에 구도(求道)의 길이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절제냐 탐욕이냐. 그런 것들은 별 흥밋거리가 아니다. 음식과 남녀, 그 안에도 구도의 길이 있다는 것. 음식과 남녀의 욕망이 삶의 빛나는 지혜를 가져다줄 아주 보편적인 입구라는 것. 성(聖)과 속(俗)이 하나라는 것. 이것이 나를 잡아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했다. 청소년들에게 성(性)이란 어떤 것일까. 어른들의 말처럼 어른이 될 때까지 참아야하는 욕망? 어른이 되어서도 해결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욕망? 어린 놈들이 무슨 성(性)? 헌데 과연 우리들은 청소년들에게 성(性)에 이런 삶의 비전탐구가 숨어있다는 것을, 과거의 사람들은 성(性)이라고 하는 원초적 욕망을 자신을 수양하고 수련하는 발판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가르쳐준 적 있을까. 정작 우리들 또한 성(性)과 식(食) 앞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은 있었을까. 좀 씁쓸하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만 누군가에서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청소년들에게 말하고 있는 성에 대한 말들. 우리의 생각들은 거기까지는 아니었는지. 그런 점에서 주단계는 우리에게 좀 생소한 언어들을 요구한다. 몸과 예절, 몸과 중용, 몸과 치유, 몸과 삶. 그는 이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책을 시작하려고 했다. 식색(食色)이라는 달콤하고 쌉싸름한 욕망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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