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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푸 세미나] 푸코, <말과 사물>로 '말과 사물'을 풍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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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약선생 작성일13-05-21 00:34 조회3,954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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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현의 표면들les surfaces d'émergence ; 제한의 심급들instances de delimitation ; 특이화의 그물들grilles de spécification" (71~73p)

우리가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고 할 때, ‘그 무언가’가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것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알기 이전에 혹은 아는 것과 동시에 우선 ‘그 무언가’가 내 눈에 띄어야 한다. 식별되지 않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 무언가’ 눈에 띄게 하는 것을 흔히 ‘대상화’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알려면 ‘그 무언가’를 대상화하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른바 ‘언설’이 형성되려면, 이 언설이 지향하고 있는 대상들이 확립되어야 한다. 예컨대 ‘정신병리학’이라는 언설이 구성되려면 정신병리학이 어떤 것들(이른바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테두리지우고 있는지가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푸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들이 어떻게 하나로 묶일 수 있었는지를 탐구해 들어간다. 이를테면 <광기>라는 사물은, 혹은 <광기>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은 어떻게 해서 정신병리학의 대상으로 묶일 수 있었는지를 살핀다. 이상하게도 ‘정신병리학’이라는 언설 속에 묶인 것들은 애초에는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광기>라고 불리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하나의 테두리, 즉 <광기>라는 테두리 안에서 같은 것들이라고 정의된다. 정신병리학의 언설은 자기 마음대로(그러나 아주 차근차근 그리고 아주 그럴듯하게) 새로운 대상의 출현을 연출해낸다. 푸코는 고고학이야말로 이런 언설의 출현 규칙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보다, 어떻게 그렇게 연결하게 되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지금은 아무런 의심 없이 정신병리학이 광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광기라는 대상 아래 병원, 편집증, 지능지수, 착란, 언어장해 등등이 연결되어 포섭, 설명되고 있지만, 처음에 이런 것들은 서로 그다지 관련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존재법칙들에 의해서 그것이 불쑥 솟아나며 ‘대상’이 된다. 이런 대상들은 일단 출현의 표면들(가족, 사회집단, 노동환경, 종교적 공동체 등)을 가지며, 언설들을 제한하는 심급들(의학, 형법적 정의, 종교적 권위, 문예비평 등)을 통해서 드러나며, 아울러 여러 상이한 것들을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체계로서 특이화 그물들(치매, 파라노이아, 분열증 등)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그 언설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가족 상태나 노동환경 위에서 의학이나 형법적 권위의 탈을 쓰고, 다양한 형태들의 체계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어떤 표면 위에, 어떤 심급들에 의해, 어떤 체계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은, 가장자리에서, 그를 해방시킬, 그를 가시적인 것 속에 구현시킬, 객관성에 대해 수다를 떨 질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빛의 최초의 경계에 존재하는 어떤 장애물에 사로잡힌 채 미리 현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들의 복잡한 그물의 실증적인 조건들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다.”(76p)

그러나 이런 대상들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들은 “다양하며 무겁다”(76p) 즉 대상이 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무 시대에나, 무엇에 관해서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대상이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그 무언가’를 우리들의 가시적 사태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실증적 조건이 구비되어야만 한다. 즉 대상이 대상으로서 인지되게 하는 실증적 조건이 뒤받침 되어야 한다. 만일 그에 맞는 실증성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내가 K를 대상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미친놈 소리만 들을 것이다. 기묘하게도 대상의 출현 조차 부지불식간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 짜고 있다. 그러나 완벽한 연출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급작스런 불연속을 통해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연출이다. 

그들은[언설들의 관계들-인용자] 말하자면 언설의 극한(언설과 비언설의 경계선)에 존재한다. : 그들은 언설에 그들이 말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제공한다. 아니면 차라리 그들은 언설이 이러저러한 대상들을 말할 수 있기 위해, 그들을 다루고, 이름짓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설명할 수 있기 위해 실행해야 할 관계들의 다발을 결정한다. 이 관계들은 언설이 사용하는 랑그가 아니라, 언설이 그 안에서 펼쳐지는 상황들이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언설 그 자체를 특성화하는 것이다.”(78p)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진행하는 것은 주체도 사회도 아니다. 그것은 언설 그 자체의 실천으로서 그렇게 된다. 언설이 움직인다. 언설이 대상을 구성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과 언설을 다루고, 이름짓고, 분석하고, 분류하는 관계들의 다발을 결정하는 것은 언설 스스로의 실천이다. 우리 혹은 누군가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혹은 제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고고학은 전통적인 주체철학이 분명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조주의(랑그)도 아니고 지식사회학(상황)도 아니다. 언설 자체가 실천되는 방식이 그렇게 대상을 구성하고 굴러가게 만든다. 오로지 언설들 자체의 실천 속에서 관계맺음 만이 있다. 그 어디에도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위치만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설의 극한에 위치하면서 언설을 구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언설의 극한에서 언설들에게 대상을 제공하고, 언설이 말할 수 있게 규칙을 제공하고, 언설이 움직이게 관계들의 다발을 결정해 준다. 언설 끝에서, 언설 밑에서. 

 “요컨대 우리는 진정 <사물들>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들을 <탈-현존화시키고자dé-présentifier>한다. 그들의 풍부한, 무거운, 직접적인 충만성 - 우리가 그로부터 오류와 망각, 환상, 무지 또는 믿음과 전통의 관성 또는 욕구와 아마도 무의식에 의해서만 떨어질 수 있는 언설의 원초적인 법칙을 만들어내는 데,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데 익숙해 있는 -을 피하고자 한다. 언설에 앞서는 <사물들>의 수수께끼 같은 보물을 오직 언설 내에서만 소묘되는 대상들의 규칙적인 형성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사물들의 바탕을 참조하지 않고서, 그들을 언설의 대상으로서 형성하도록 해주는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역사적 출현의 조건들을 구성하는 규칙들의 집합 ensemble des régles에 관련시킴으로써 이 대상들을 정의하고자 한다.”(81p)

푸코는 <사물들>도 넘어서려고 한다. 아니, <사물들>이야말로 넘어서야만 한다. 사물들 자체도 언제나 이미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사물들이 존재하게 했던 규칙들의 집합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물들이 대상화되었던 그 근거를 밝혀냄으로써, 그 대상들을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원래 정의되었던 대상들은 이 규칙들 앞에서 분산된 채로, 그 출현의 역사적 조건들 아래에서 투명하게 드러난다. 서로 아주 이질적인 놈들이었다는 것을. 바로 그때 그것은 사물들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탈-현존화’된다. 즉 풍부하고 무겁고, 충만하게 구성되어 있었을 “그” 사물들이 해체되고, 사물들을 구성하기 이전의 조건들, 그리고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 규칙들을 발견해낸다. <사물> 이전의 규칙!

<언설들>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말들과 사물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얽힘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키고자 한다고 말할 것이다. : 사물들의 희미한 흔적, 말들의 뚜렷한, 가시적인 착색과 연쇄. 우리는 언설이란 실재와 언어의 접촉 또는 대면의 얇은 표면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의 어휘와 하나의 경험의 얽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는, 정확한 예들에 관련해, 언설 자체를 분석함으로써, 말과 사물의 외면상 매우 강한 포옹이 늦추어지는 것을 그리고 언설적 실천에 고유한 규칙들의 집합이 풀어지는 것을 알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규칙들은 실재의 말 없는 실존이 아닌, 어휘의 규칙적인 사용이 아닌, 대상들의 체제를 정의한다. <말과 사물>, 이는 한 문제의-진지한-제목이다. 이는 이 문제의 형태를 수정시키고, 그의 소여들을 변위시키고, 결국 전혀 다른 작업을 드러내는 작업의 (풍자적인) 제목이다. 이는 언설들을 기호들의 집합으로서 다루지 않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의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실천으로서 다루는 작업이다. 분명, 언설들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것은 사물들을 지시하기 위해 이 기호들을 사용하는 것 이상이다. 그들을 랑그나 파롤에로 환원불가능한 무엇에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이상이다. 나타나게 해야 하는 것, 기술해야 할 것은 이 <이상plus>인 것이다.”( 82~83p)

푸코는 언설이 언어와 실재가 접촉하는 곳에서 탄생한 것[언어는 어떤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서 실재와 접촉하는 곳에서 기호적으로 탄생했을거라는 기존의 오해들]이라는 것에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언설은 언어도 실재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말도 사물도 아니다. 따라서 말과 사물이 얽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규칙들이다. 그리고 그 규칙들은 말 없는 실존(우리가 흔히 사물이라고 생각하는)도 아니다. 또한 그 규칙들은 어휘의 규칙적인 사용(우리가 흔히 말이라고 생각하는)도 아니다. 따라서 푸코는 자신의 저작인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이 아주 풍자적인 제목이라고 실토한다. 말과 사물이 아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서 <말과 사물>을 제목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그것은 푸코 말대로 풍자적이다. 말에 대해서도, 사물에 대해서도, 말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랑그도 파롤도 아닌 그 이상(plus)을 말하기 위해서 <말과 사물>을 제목으로 내세워 말과 사물을 ‘풍자’하였다. 언설은 말과 사물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극한에 규칙들의 다발로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말과 사물을 해체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댓글목록

송씨님의 댓글

송씨 작성일

대단한 약샘!^^ <지식의 고고학>을 이렇게 쉽게 풀어쓸 수 있다니요! (<지식의 고고학> 읽어보시면 압니다ㅠㅠ) 씨앗문장들이 너무 훌륭합니다~ 말과 사물  너머에서 그것들을 움직이는 그 힘, 그 이상(plus)을 탐구하려고, 언설이 없는 그 곳에서 새로운 언설을 창조해내는 푸코가 너무 존경스러워요~

약선생님의 댓글

약선생 댓글의 댓글 작성일

음...이제 그대도 "약씨"라고 하도록 하구려..... 약치는 솜씨(송씨?...)가 날로 날로 일취월장, 괄목상대, 일진월보.....음....암튼...그러하오. 다만 그게 교언영색이 아니길 빌뿐이오. 그래도 계속, 주욱~ 그렇게 약쳐주시오...ㅋㅋㅋㅋ

오우님의 댓글

오우 작성일

어렵지만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언설 극한에 존재한다.' ~~

약선생님의 댓글

약선생 댓글의 댓글 작성일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해서 공부하시는 선생님 모습 보면, 너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공부 같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