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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푸들> 니체의 서광 2권 후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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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yung 작성일13-06-03 19:43 조회2,1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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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번째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에 붙은 ‘’를 놓치지 않고 이것이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셨죠? (그냥 지나칠 뻔 했어.) 이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가열하게
2권의 후반을 읽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태에 처한 타인을 보고 우리는 고통을 느끼죠. 이것을 동정한다고 말합니다. 동정은
사실 무엇에서 비롯된 감정일까요? 그리고 왜 경계해야 한다고 할까요? 동정이 고통을 낳고 유해한 감정
(복수심, 자기방어,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상실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나약함의
소치입니다.  “본질적으로 유해한 동정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세상에 또 하나의 고통을 덧붙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동정적인 행위를 할 경우에 우리가 제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고통뿐이다. 우리는
동정을 결코 하나의 동기에서 행하지 않는다. 이 경우 우리가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동일한 행위에 의해 쾌락의 충동에 굴복하는 것이 확실하다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정신의 활동이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사람들은
염세주의를 신봉하게 됩니다. 이 때 동정은 삶을 유지하는 가치를 갖게 되죠. 역겨움과 공포로부터 삶을
견디게끔 하는 힘을 주고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우월함을 맛보게도 합니다. 쾌락이 숨어있었던 거죠.
Sympathy는 동정과 공감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고 송 선생님이 밝혀주셨어요. 공감을 해야 동정이
일어날 거 같은데 동정을 가능하게 하는 공감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섬세하고 연약한 본성 때문에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겁 많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공포심이야말로 공감을 가르치는 선생이며 타인(동물까지 포함해)의 감정을 재빨리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수천년 동안이나 인간은 인간의 모든 낯선 것들과 살아 있는 것들 안에서 위험을 보았다... 저 오랜 공포의 습관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자연에 대해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이해를 가르치는 선생인 공포가 없었다면 우리가 인간과 동물에 대해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것처럼

동정은 사실 도덕의 핵심이 아닌가? 그리고 짜라투스트라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뭐라고? 도덕적인 것의 본질이 우리 행위가 타인에게 초래하는 가장 직접적인 결과를 염두에 두고 그에 따라 마음을 결정하는 데 있다고? 이것은 아무리 도덕적일지라도 편협하고 소시민적인 도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가장 가까운 결과를 무시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좀더 먼 목표를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내겐 한층 더 높고 한층 더 자유로운 관점으로 생각된다.
 
니체는 우리의 행위들과 삶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악한 겉모습을 제거하라고 명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더 이상 악한 존재로 여기지 않을 때 악한 존재의 고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는 3권을 시작합니다.^^ (뭐라고!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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