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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그몸]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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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닐리리아 작성일13-03-12 11:59 조회2,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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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 동안 제겐 '바람소리'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번 발제를 하면서, 비로소 그 시대에 이렇게 희한한 말들이 있었음을, 그 말들을 놓고 엄청 진지한 논쟁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흰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
'말'이라는 이름은 형태를 지시하고, "흼"이라는 이름은 색깔을 지시한다. 색깔을 지시하는 것은 형태를 지시하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흰말은 말이 아니다" (by 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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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말은 말이다. 흰말을 타는 것은 말을 타는 것이다. 검정말은 말이다. 검정말을 타는 것은 말을 타는 것이다. (by 후기 묵가)
사실 공손룡 부분을 공부할 때, 세미나의 다른 선생님들은 열변을 토하며 그 재미를 느끼셨을 진 모르겠지만 전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더랬습니다. '흰 말이 흰 말이지 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딱딱하고 흰 돌이 가리키는 대상이 하나인 지 둘인지 셋인지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말 없이 저는 잠시 다른 세계에 가 있엇습니다.
말은 호칭의 표출이다. (지식이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말은 입이 주는 이로움이다. 말의 내용에 근거하여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심의 변별작용이다. (by 후기 묵가)
전국시대, 흔히들 전쟁의 시대라고 합니다. 정치가 불안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민심이 동요하던 시대. 그래서 무력이 사람들을 지배했던 시대라고들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알고보면 그 기저엔 '말'의 경합이 있었음을 요즘 중국철학사를 공부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힘보다 사유가 물질을 움직이는 시대! 사태를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지식구성방식의 맥락은 무엇일까- 그건 차차 탐구해가야할 부분일 것입니다. 이번 <후기묵가> 내용은 그 말 자체에 대한 흥미 이전에 대체 왜 이들이 이토록 싸워야만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싸웠을까 생각해보게 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말'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중국사유의 저자 마르셀 그라네는 후기묵가를 설교사제단에 비유한 적 있습니다. 야망으로 지혜를 저버린 군주들이 다시 지혜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해 그들은 설법용 기본 훈시문을 소지한 채 삿된 고문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들은 추론의 이론가들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논리를 연구하고 제시하는 이론가들보다 말이 삶에서 더 절실한 투사들이었죠.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윤리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기도 했고,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 싸움에 임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랬기에 그들에겐 무기를 만드는 법 못지않게 말을 갈고 닦는 법, 즉 '논리'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말이란 돌처럼 정교하고 굳세야 한다. 즉 "논변"의 여러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
이름으로써 실상을 제시하고, 명제로써 의미를 표현하며, 논증으로써 이유를 밝힌다. (묵경, 소취편)
 
반드시 삼물이 갖추어져야 논변이 타당하게 성립할 수 있다. 모든 논단(명제)은 '故'에 의해서 도출되고, '理'에 의해서 신장되며, '類'에 의해서 진행된다.
  논단을 수립하고 그것이 도출된 이유를 모른다면 망언이다. 사람은 길이 아니면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아무리 힘 센 팔다리의 소유자라도 길을 모르면 이내 곤경에 빠질 것은 뻔하다. 무릇 논단이란 유추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논단을 수립하고 그 유추를 잘 모르면 반드시 곤란에 빠진다. (묵경, 대취편)
특히 대취편에 대한 주석을 통해 풍우란은 이들의 논리가 서양의 3단논법과 동일함을 밝힙니다. 그것이 타당한지 여부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들은 그냥 허투루 싸움에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을 따라가느라 좀 힘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 절실함에 기반을 둔 정교한 논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겸애'를 비판하는 변자들에 대한 논변 中 -
변자: "천하의 인구(남방)는 무한한데 어떻게 다 사랑할 수 있겠는가?"
묵변: 1. 무한한 남방에 사람이 충만해 있지 않으면 사람 수가 유한한 것이다. 무한한 남방에 사람이 충만해 있다면 그런 무한은 사실상 무한하지 않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구를 포함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2. 그 수를 몰라도 모두를 사랑할 줄 안다. 왜냐하면 물으면 되기 때문이다.(혹은, 왜냐하면 밝히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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