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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세미나 후기] 마음의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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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미 작성일11-03-16 22:24 조회4,53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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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6일, 마음세미나에


정화스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몸에 새겨진 기억이 근육인 것처럼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서


마음의 행로를 바꾸면


지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엉? 어떻게?


도반들과 함께


스님께 들은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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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낯선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지복至福감’을 느끼는 것.


이건 아들 딸 공부 잘 해서 느끼는 기쁨을 넘어서는,


이전의 어떤 것을 통해 얻어진 것보다


커다란 기쁨이다.


초선初禪 때 이런 희락喜樂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기쁨을 우리는 왜


일상에서 늘 느낄 수 없는 것일까?


 


몸의 근육,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이 만들어낸 기억이 근육이라면


기쁨은 ‘마음의 근육’을 만든다.


몸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공부工夫’를 무술인 ‘쿵후’와 연관짓는 것도 그 때문.


내게 오는 사건들에서 기쁨의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라.


 


물질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다르다.


어떤 조건에서 물질은 파동으로


어떤 조건에서는 입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파동은 끝까지 파동으로만


입자는 끝까지 입자로만 있다고 하는 주장이


하나의 고정된 인식틀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집착이 되고


이 집착이 변화하는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여


괴로움을 만든다.


 


종교를 빼어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기 힘든 지복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것도 지속되면 감응이 없어진다.


마음의 근육이 굳어져 도그마가 된다.


내 종교 네 종교 나누고


내 종교가 맞다고 우기게 된다.


지복감을 생성하지 않는 종교


감응이 없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으뜸가는 가르침 : 종교宗敎’가 아니게 된다.


 


세계를 해석하는 습習이 쌓인 게 업業이다.


이 업이 마음에 여력을 남기게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런 해석이 만들어지게 되었나에 대한


마음의 근육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모양으로 형성되었나에 대한


자각이 없어진다.


 


‘안다’라고 하는 것은


결정되어 있는 마음의 양상으로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해석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사건이 이렇게 해석되도록


마음이 훈련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


 


내 가르침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생각은


해석 체계를 넘어선 경험 세계를


내게 익숙한 해석 체계로 돌아가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을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이 순간, 관계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남게 된다.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있는 그대로 삶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양상으로 세계를 틀지우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세 가지를 밝게 알아야 깨어 있다고 한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현재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가 끊임없이 개입하는 사건이다.


과거의 사실은 지나가는 게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능력이다.


현재는 과거가 미래가 되는 시점이고


동시에 미래가 과거가 되는 시점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라는 것을 투철하게 아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힘이 약해지면


현재를 밝게 아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잠깐 경험한 과거의 사실에 현재가 발목 잡히게 된다.


하나의 사건을 발생한 그 자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해석에 붙잡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탐심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진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어떤 해석에도 구애됨이 없이


사건 그대로를 보면


탐심, 진심 발생 안 한다.


이때 찾아오는 평온한 마음이 기쁨이다.


 


원하는 걸 얻어서 좋은 게 아니라


좋고 싫은 걸 떠나 고요하게 지켜보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


이렇게 해서 마음이 기쁘면 몸에도


기쁨을 전달시키는 물질이 만들어진다.


 


들떠 있는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면


사람이 죽게 된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들뜬 마음의 상태를 고요하게 만들어


들뜬 마음의 화학물질을 다른 양상으로 바꾸어


기쁨을 지속하는 힘이 생기면


과거의 어떤 사실이


현재에 번뇌를 만들지 않는다.


현재를 보면


과거도 밝아지고, 미래도 밝아진다.


 


표상表象이라고 하는 것.


코끼리 ‘상象’자가 재미있다.


중국에 옛날에는 코끼리가 살았다.


후대로 오면서 남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래서 원래 상象이라는 글자, 코끼리 보면서 만든 거였는데


후대에 와서는 직접 본 게 아니라 이미지로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게 대부분 이런 표상 작용이다.


내 안에 쌓인 인식 체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앎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만이 옳다라고 하면서 낯선 것을


내 해석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쾌해 하는 것


해석 체계 너머의 경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것


이게 업이다.


 


내가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가 만났을 때


본다 라는 하나의 사건이-


인식이 ‘발생’한다.


인식이 연기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것.


주체로서의 자아도 없고


객체로서의 대상도 없다.


 


<질문 1> 시아주버님과 사이가 안 좋다. 왜 이런 인연이 생겼나.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100% 시아주버님이 잘못했다고 치자. 중요한 건, 옳고 그른 걸 떠나 시아주버님을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내가 괴롭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 15년 동안 꾸준히 사이가 안 좋았다면 전에 1이었던 사건이 지금은 10만큼 크게 느껴질 것이다. 나를 힘들지 않게, 나를 편안하게 하는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야. 좋은 것을 떠올려 잠드는 습관을 만들어 보라. 좋은 것도 있을 텐데 싫어하는 마음에 그건 완전히 묻혀버린다. 백 가지 나쁜 게 있으면 그중에 하나는 좋은 기억이 반드시 있다. 아이들이 건강한 것,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구체적으로 언어화시켜 자기 전에 기억하고 자면 ‘좋은 창고’를 여는 훈련이 된다. 다른 마음의 근육을 만들면 같은 사건도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시아주버님이 변할지 안 변할지는 모르지만 나의 괴로움은 조금씩 덜어지게 된다. 시아주버님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라.


 


<질문 2> 친구 결혼할 때 부조금을 적어도 5만원은 해야 하는데 내겐 그게 부담이 된다. 그보다 적게 하면 또 마음이 불편하다. 어떡해야 하나.


 


지금 편하게 낼 수 있는 돈이 3만원이면 3만원을 내라. 그리고 내고 난 다음 ‘이거 너무 적은 거 아닌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한테 기꺼운 행동을 하고 그 뒤에 마음의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 다른 말들로부터 편안해지는 훈련을 하라. 3만원 내고 정 마음이 불편하면 갈비탕 안 먹으면 된다.


 


<질문 3> 자비명상을 하면서 위아래 모든 방향에서 어떤 형태가 떠오르고 머리 위에서 좋은 기운이 퍼지는 체험을 했다. 이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좋고 나쁜 게 없다. 명상 하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는데 이 색다른 경험에 대해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 그냥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상태가 온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않고, 나쁜 상태가 온다고 해서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 그렇지 않고 특정 상태에 대해 집착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게 힘을 남겨서 업이 된다. 목표는 ‘좋은 것’이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이다. 좋은 것도 지속하려고 하면 번뇌가 되고, 싫은 것도 물리치려고 하면 번뇌가 된다. 좋고 싫은 걸 떠나 모든 사건을 고요히 지켜보는 마음의 힘이 커질 때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거-마음대로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 일이 거의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다만 그 일에 대한 내 마음의 판단작용-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의 업식을 멈추고,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의 힘을 기르게 되면,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번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질문 4>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고 하여 유식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진여’와 ‘번뇌’가 겹쳐져 있다는 뜻인가?


 


번뇌가 있을 때는 진여가 없다. 사건은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따라, 인식의 내용에 따라 진여도 되고 번뇌도 된다. 깨닫는 순간 전과거와 업식이 총체적으로 진여로 바뀐다. 중첩되어 번뇌 속에 있으면서 진여는 못 보는 게 아니다. 번뇌를 볼 때는 번뇌밖에 없다. 깨달은 사람은 온전히, 전체로, 항상 깨달은 사람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항상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진여의 작용이 미미할 때-힘이 약할 때가 번뇌. 기신론에서는 가장 처음의 깨달음을 ‘범부학’이라고 한다. 이 범부학의 상태에서는 한 번 깨달아도 다시 그 사건이 오면 번뇌가 발생한다. 예외적인 순간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늘 깨어 있음을 되도록 수행을 계속해야. 안 그러고 한 번의 예외적인 체험을 고집할 때 수행이 더 큰 번뇌가 된다.


 


<질문 5> 성매매 여성,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상담을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낙태에 대해서 전에는 “너의 선택이다”라고 쿨하게 말했는데 불교 공부하면서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나 낙태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문제와 관련된 상담을 하기 힘들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문제 설정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나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해야. 낙태를 해도 되나 말아야 하나에 관한 입장. 낙태 절대로 용납 못 한다고 하면 낙태반대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건이 안 일어나면 좋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 때문에 이미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면. 그 사건에 대해서 죄의식을 안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낙태라는 하나의 사건에는 여러 가지 인과가 겹쳐 있다. 그것을 내 문제로만 만들어서 자신을 괴로움으로 몰고 가지 않는 것. 같은 화살에 두 번 맞지 말아야.


 


<질문 6> 100일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하루나 이틀 하다가 그만둘 때가 많다. 끈기있게 뭘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늘 새로 시작하면 된다. 100일기도 단번에 안 되는 거 당연하다. 지금 내가 그걸 못 하는 건 내가 처한 여러 가지 조건 때문이다. 100일기도 할려고 하다가 안 되는 거 때문에 자책하게 되면 그런 기도 할 필요 없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한데 마음대로 되는 것(불가능한)에 기준을 맞추니까 사는 게 힘들어진다. 100일기도 안 되는 거 99.9% 당연한 일이 일어난 거다. 백일 중에 하루라도 했으면 기뻐할 일. 백일 중에 하루라도 한 게 기쁘면-그 일이 나에게 진심으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기쁨이라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보상을 바라는 일은 절대 안 일어난다. 원숭이로 실험한 일이 있다. 한 원숭이에게는 바나나 주면서 일 시키고, 다른 원숭이에게는 아무것도 안 주고 일 시켰다. 처음 며칠은 바나나 준 원숭이가 신나게 일한다. 그런데 나중에 바나나 안 주면 힘들어서 못 한다. 하지만 그냥 일한 원숭이는 점점 자기가 그 일에 재미를 붙여서 계속 잘 한다. 또 어떤 스님이 삼년동안 묵언 수행했다. 그런데 삼년 되는 마지막 날 암자 앞에 떠드는 애들한테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삼년 묵언이 깨졌다. 이 마지막날 하루 못 한 거 때문에 앞에 한 거 도루묵 된 거 아니다. 하루 못 해도 2년 364일 한 거 기쁜 일이다. 나의 존재를 긍정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라는 걸 적게 해야. 내가 해주는 것도 넘치도록 하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을 충분히 쉴 정도로만 해야. 난 이만큼 해줬는데 이 말 안 하도록. 몸이 지치면 격한 감정이 나오게 된다. 그걸 상대가 몰라주면 더 힘들어져.


 


<질문 7> 자의식이 강해서, 타인이 모두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서 괴롭다. 지렁이는 자의식이 없지 않나. 아와 법의 분별이 없으니 덜 괴롭지 않을까.


 


지렁이도 자의식 있는데 인간의 척도만큼 고락苦樂의 갭이 크지 않다. 다윈이 어떤 섬에 갔더니 꽃이 30cm 길이가 되는 꽃이 있었다. 이 꽃을 보고 ‘아, 부리가 이 길이만큼 되는 새가 이 섬에는 살고 있겠구나’ 추측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그런 새가 그 섬에 살고 있었다. 환경에 따라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자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고정된 자신의 어떤 모습을 찾으려 하니까 괴롭다. 매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다. 얼굴 대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건 나야 라고 하면. 그래서 괴로운 상태가 ‘무지’이다. 즐거운 상태가 ‘지복’이다. 고락을 잘 살펴서 나로 있으면서 지복감을 느끼도록 해야. 그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세계를 전체적으로 살아가는 자기일 때 가능하다. 변화에 밝게 깨어 있어서 나의 고정된 신념체계로 세계를 판단하지 않는 것. 총상 속에서 모든 개체가 다른 모습으로 평등하게 존재한다는 것. 인연과 더불어 인연의 장 자체를 자기로 만드는 것.

댓글목록

선민님의 댓글

선민 작성일

<p>마음의 근육을 다르게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 괴로운 일로 괴로워하는&nbsp;것이 어리석음라고 하셨던 말씀이 오래 기억에 남네요.&nbsp;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