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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세미나 중간 에세이] 배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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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유미 작성일11-10-27 20:16 조회3,16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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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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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세미나 5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최유미 (2011년 10월 19)


 


1. 헛발질


 


처음부터 마음공부에는 별 기대가 없었다. 수년 전에 몇 년 동안을 마음의 평화를 얻어보려고 기수련, 마음수련 등등을 기웃거렸었고 처음에는 솔깃한 것도 있었으나, 창안자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 신비주의, 그리고 이러저러한 장삿속 등을 발견하면서 이제 그만하자로 귀결되었다. 인생을 살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그 순간들을 피하지 말고 대면하는 수 밖에 뾰족한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울고.. 그러나 이 모든 순간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체득할 만한 나이에 다다르니 더 이상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수유너머+]에 온 것은 세미나 제목이 현대물리학과 불교였기 때문이었다. 왜 과학을 종교에 끌어다 붙이는 걸까? 라는 약간 냉소적인 의문이 첫째였고, 공부를 빡세게 하는 집단일 것 같은 막연한 기대로 옛날 서당 분위기의 공부 법(어딘가 책에서 본적이 있는 것 같다. 묵독보다 암송이 좋다고)을 전수하는 줄 알고, 한번 익혀보고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자 함이 두 번째 목적이었다.


 첫 세미나를 하고 한참 잘못 집은 번지 수임을 알았다. 세미나의 형식도 제대로 모른 체, 무엇이든 숙제는 제일 먼저 하는 버릇대로 첫발제로 나섰고 낑낑거리며 읽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러 저러한 선입견으로 별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해야 맞다. 본래심이 무엇인지? 무자공안이 왜 무문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공안인지? 내 눈에는 다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무자 공안을 온몸으로 힘써 수행하라니도대체 수행은 무엇인가? 참선이 왜 수행인가? 절에서 주는 밥 먹고 온갖 苦로부터 도망쳐와 있는데  무슨 번뇌가 생길 것이 있다고…’불법이란 언어로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다라고 하면 될 것을 대중이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로 신비감을 극대화 시킨 협잡질이란 생각이 반쯤은 있었다. 이러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는가! 어떻게 발제를 해야 할 지 난감 했다. 어짜피 고수가 설명을 해 줄 테니, 컨닝페이퍼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발제자가 독서 감상문(?)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컨닝페이퍼가 발제문으로 둔갑하고 완전히 민폐를 끼치고 욕도 제대로 먹었다. 그러나 사실 형식을 제대로 알았던들 제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미나는 나름 자의식이 꽤 세게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든 자기마음을 독서를 통해서 다스려보려고 하는 지나치게 진지한, 경건하기까지 한 자리였다. 그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욕 먹고 그만 두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주저 되었다. 쯧쯧.. 나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다음 책은 금강경이었다.  1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십구제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일곱 번을 뜻도 모르고 베껴 쓰고 매번 염송을 했던 그 아냑다라삼먁삼보리의 금강경인 것이다. 붓글씨를 잘 쓰셨던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 마치 당신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하셨던 것처럼 약간 편집증적으로 금강경을 많이 쓰셨고,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시고는 당신의 관에도 직접 쓰신 금강경을 넣고 가셨다.  나에게 금강경은 우리 아버지를 극락왕생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주문 같은 것이었다. 금강경을 제대로 읽어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세미나의 본전은 뽑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투자 대비 효과를 계산하고 움직이는 인간이다!)


 


2. 無常


세상 만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고,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내 세포들도 1초에 수백 개 씩 죽고 태어나고, 내 생각도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변하지 않는 것은 타자에게 인식된 인데 그것은 이미 實在의 가 아니다. 도대체 라고 규정할 변하지 않는 무언가는 없다. (물론 생물학적인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죽어서 유골만 남았어도, 유전적인 특성으로 나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총체성을 말한다.) 단 한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귀동냥으로 들은 모든 것이 空이다라고 하는 것을 아무것도 없는 것(empty)로 이해했었다. 결국 죽게 되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공허하게 들렸었다. 지금 살아있을 때의 고뇌를 해결하지 못해서 허덕거리고 있는데 결국은 죽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논리는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삶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나는 혼자서는 만들어질 수도, 존재 할 수 없다. 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태초부터 모든 것이 관계했다. 지구라는 별이 만들어 질 때, 핵력의 강도가 혹은 전기력의 강도가 영 점 몇 퍼센트만 달라졌어도 탄소는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로 지구상에는 생명체가 존재 할 수 없었다. 세상만물과 그 관계가 우주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인과의 연속된 고리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결국은 네가 없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규정할 수 없어서 라는 한계 구별이 무의미하고,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또한 , 의 구별이 의미가 없다. 과거의 기억으로 내 존재를 규정하지만, 그 순간 이미 나는 규정된 그 모습이 아니다. 無常이다. 無常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이해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갈구하는 것()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가질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다. 헛된 꿈인 줄 똑똑히 알면 못 가져서 안달할 일도, 쫓아갈 일도 아닌 것이다. 나와 너의 분별이 무의미하고 모두 인과로 얽힌 한 덩어리임을 분명히 알면, 남을 위한다고 생각하는 좋은 일도 사실은 나의 일이고, 남에게 당한 나쁜 일도 사실은 내 뱃속에 차고 있는 똥인 것이다. 모든 것이 나의 일인데, 좋고 나쁨의 분별이 어떻게 생기겠는가!  단지 똑바로 보기만 한다면, 사실은 모든 것이 열반이고 부처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논리의 흐름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앞, 뒤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 금강경은 신비로운 주문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논리정연 하게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익숙한 모델과의 결별 그 어려움.


똑바로 보는 일이 사실은 쉽지 않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언제나 똑바로 보는 일은 어쩌면 논리적으로만 가능한 일 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실상은 개는 언제나 개로 보이고,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익숙하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기억된 형태로 세상을 인지해 왔고, 정신과 육체, 개와 사람, 너와 나의 분별로부터 지식을 쌓아왔다. 분별은 어쩌면 인간 知性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지성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머리로 하는 이해는 너무 딱딱 맞아 떨어져서 어떤 반박도 불가능하나 몸이 따라가기는 너무 어려운... 그래서 경전을 읽고 또 읽고 또 그것을 불태워버려야 하고, 스승은 말과 글이 아니라 상황으로, 몸으로, 눈짓으로 밖에 제자에게 가르칠 수 없고, 또 스스로 없어져줘야 하고 무문관은 치열한 수행의 기록이었다. 처음에 무문관을 읽었을 때 느낀 不立文字에 대한 강한 집착이 敎外別傳에 대한 강박으로 나타나 또 하나의 도그마를 보는 것 같은 불편함이 사라졌다. 생각의 대 반전은 금강경을 읽고, 정화스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이다. 無常의 세계관에 대한 논리적 흐름이 쭉 연결되고 나서야 미망에서 조금은 깨어나는 것 같다. 선승들의 강박적인 집착이 없었다면, 선불교는 전승되지 못했으리라집어 던졌던 무문관이 제대로 읽혔다.


 


4. 마음 공부


나는 감성이 풍부하다. 책이나 신문을 보고도 감정이입을 잘하고, TV를 보고 잘 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여린 모습이 여성성으로 학습된 산물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학교 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학공부를 열심히 했고, 바로크 음악도 열심히 들었고, 이론 물리화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리고 지금도 수학을 무지 못하는 우리 아들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좀 잘난 척을 한다. 또한 아들에게 수능시험을 잘 보게 하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라고 궁극의 잘난 척을 보여준다. 아들은 조금쯤은 위선이라고 생각 하고, 조금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딱 그만큼만 아들녀석의 수학의 진전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불교의 세계관도 일단 나의 이해로는 논리적으로 빈 구석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위 없는 깨달음에 마음을 내는 보살의 삶을 살 자신은 없다. 앎이 몸에 배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할 것이다. 얄팍한 앎은 또 다른 고통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태생적으로 마음이 잘 일어나는 사람이다. 아무리 쿨 한 척 해도 아버지가 상속해 준 유산은 숨겨지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일어날 때 그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내 던져버리지는 않겠다는 것이 다시 마음 공부를 시작한 나의 발심이라면 발심이다.


 

댓글목록

엠마님의 댓글

엠마 작성일

<p>읽으면서 진솔히게 느껴지고, &nbsp;마음이 따뜻해지네요.&nbsp; 학인으로&nbsp;쭈욱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nbsp;&nbsp;기대합니다.</p>
<p>솔직히 모두들&nbsp; 깨달음을 통해 어떻게 &nbsp;변해갈 지 &nbsp;궁금하거든요.&nbsp; 나자신을 포함해서.......</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