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0>양생과 정치 > 스크랩

스크랩

홈 > 자유게시판 > 스크랩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0>양생과 정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장금 작성일12-04-20 14:14 조회3,110회 댓글0건

본문

잘 산다는 건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 맺는 것



 

 


종종 밝혔듯이, 올해는 운기상으로 목(木)기가 ‘태과한’ 해다. 목은 동쪽이고 바람이고 나무다. 나무에는 갑목(甲木)과 을목(乙木)이 있다. 갑목은 양, 을목은 음이다. 전자가 위를 향해 솟구치는 나무라면 후자는 넝쿨과 풀꽃들처럼 옆으로 뻗어가는 나무다. 올해는 목기가 ‘센’ 해니까 갑목에 해당한다. 갑목의 기운은 과감하고 역동적이다. 대신 뒷마무리가 좀 약하다. 여러 모로 정치적 활동과 닮았다. 시작은 늘 창대하지만 뒷수습은 항상 미약한 점에서도. 마침 올해는 정치 시즌이다. 천지에 바람이 가득하듯 1년 내내 정치의 바람이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정치란 대체 무엇인가? 통치의 기술 혹은 권력 게임? 대의제와 민주주의? 하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삶의 비전’, 혹은 자유와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이어야 하지 않을까.

‘열하일기’의 장쾌한 여정에서 연암 박지원은 ‘이용후생’을 설파한다. ‘이용후생’이란 ‘물질을 이롭게 써서 삶을 도탑게 한다’는 의미다. 수레와 온돌, 건축과 벽돌 등 청나라 문명의 근간을 세심하게 관찰해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연암의 비전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용후생은 ‘정덕(正德)’으로 귀환한다. 정덕이란 말 그대로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 이용후생이 문명적 진보를 뜻한다면, 정덕은 존재의 자기구현과 우주적 소통에 해당한다. 삶이란 어떤 경로를 거치건 반드시 이 무형의 가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유와 행복이 없다면 문명과 제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물질적 풍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의 트리아드(triad·삼중주)! 이것이 곧 ‘삶의 비전’이다.

‘동의보감’식으로 말하면 양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양생은 생명의 정기신(精氣神)을 자양하는 수련법이다. 하지만 그 수련에는 사회적 윤리를 닦는 ‘수양’과 생사의 관문을 넘는 ‘수행’이 수반되어야 한다. 생명의 핵심이 ‘수승화강’이듯, 잘 산다는 건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능동성과 생리적 순환은 함께 간다. 한편 삶과 죽음은 하나다. 죽음에 대한 성찰과 훈련이 없이 잘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늘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원초적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곧 수행이다. 따라서 양생에는 수련과 수양, 또 수행이라는 ‘세 바퀴’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좋은 삶’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현대 정치는 ‘삶의 현장’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연암 식으로 말하면, 오직 ‘이용후생’에 매달릴 뿐, ‘정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결과 정치란 한낱 정파 간의 파워 게임 혹은 정당 활동으로 대치되어 버렸다. 대체 여기에 ‘삶의 비전’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존재의 구원과 행복 같은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갑목은 뒷마무리가 약하지만 무엇보다 ‘살리는’ 기운이다. 그래서 오륜(五倫) 가운데 인(仁)의 덕목에 조응한다. 그러므로 나는 소망한다. 갑목의 기운을 타고 불어오는 이 거칠지만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정치가 부디 낡은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양생적 비전과 접속하게 되기를! 하여 아주 낯설고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도처에서 창안되기를!

고미숙 고전평론가


 


(12. 4. 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양력 2024.4.26 금요일
(음력 2024.3.18)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