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판소리 질펀한 말잔치에 담긴 행복의 비밀 > 스크랩

스크랩

홈 > 자유게시판 > 스크랩

<한겨레>판소리 질펀한 말잔치에 담긴 행복의 비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0-26 21:22 조회3,702회 댓글0건

본문

내 서재 속 고전

한국 판소리 전집
신재효 지음, 강한영 옮김/서문당 펴냄(1996)

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
정출헌 지음/아이세움 펴냄(2009)

현대인들의 화두는 ‘행복’이다. 정규직을 열망하는 이유도, 스펙에 매달리는 이유도, 성형에 올인하는 이유도 다 행복을 위해서다. 그런데 결과는 아주 유감스럽다. 피로 아니면 중독, 권태 아니면 변태. 쉽게 말해 ‘죽거나 나쁘거나’인 것.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즐거움의 연속’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즐겁지 않은 상태가 오면 곧바로 우울해지고 얼른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쾌락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고, 그렇게 우울함과 쾌락을 바쁘게 오가다보면 어느덧 중독이라는 덫에 걸려 드는게 아닐까, 하고.

만약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행복을 위해 달려갈수록 더더욱 불행해진다는 역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전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일단 그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회경제적 차원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는 기본적으로 카오스다. 따라서 찰나찰나가 무상하다. 우리들의 몸과 감정 역시 쉬지 않고 움직인다. 아니, 거꾸로 변화무쌍해야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된다. 즉, 생명은 즐거움의 상태만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 희로애락애오욕, 칠정(七情)을 다 누리고 싶어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칠정의 파노라마를 원한다. 발산과 수렴, 상승과 하강, 기쁨과 슬픔, 분노와 자비, 등등. 왜냐하면, 그 파노라마가 연출하는 파동이 곧 생명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은 오직 소유와 증식만을 갈구하기 때문에 감정 또한 한없이 끌어올리려고만 든다. 그러다 보니 행복은 즐거움으로, 즐거움은 쾌락으로, 쾌락은 중독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 치명적 덫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칠정을 고루 느끼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기쁨과 즐거움에만 고착되어 버리면 슬픔이나 분노 앞에서 쉬이 무너지고 만다. 또 슬픔이나 분노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능력 또한 위축되어 버린다. 결국 핵심은 희로애락을 매끄럽게 통과하는 일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래서 고전이 필요한 것이다. 고전은 단순히 내용이 훌륭한 텍스트가 아니다. 고전의 말과 소리에는 호흡을 조절하고 정서적 치우침을 조율하는 파동을 지니고 있다. 희로애락의 진수가 담긴 고전이라면 ‘판소리계 소설’이 단연 으뜸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가 낳은 최고의 민중예술이다. 고수는 북을 잡고 광대는 창을 한다. 무대는 단순하고 울림은 압도적이다. ‘귀명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청중의 추임새가 중요하다. 창과 아니리, 비장과 골계가 교차할 뿐 아니라 느림의 극한인 진양조에서 흥의 절정인 휘모리 장단까지 두루 갖춘, 요즘말로 치면 ‘융복합적’ 예술이다. 장르적으로 세밀하게 분화되어 오직 하나의 정서만을 부각하는 현대예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념과 도덕 뛰어넘는 ‘인생고수’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중요한 건 희로애락을 마주하는 것
행복이란 결국 이 ‘마주침들’ 자체

판소리계 소설의 끝내주는 입담
말이 곧 밥이자 무기이며 삶의 비전
말의 원천은 희로애락의 파동
소리내어 읽어야 제대로 맛이 난다

원래 열두마당이었는데, 19세기에 이르러 여섯마당으로 축소되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등이 그것이다. 19세기 중반 당대를 주름잡던 예인 신재효가 정리한 <한국 판소리 전집>(강한영 옮김, 서문당, 1996)이 가장 대표적인 텍스트다. 양반 취향에 맞추느라 표현을 많이 순화시킨 것이 흠이다. 이본들의 다양성과 생동감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면 <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정출헌, 아이세움, 2009)를 참고하시라.

판소리계 소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념적이거나 도덕적이다. 즉, 신분적 모순과 해방의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아니면 삼강오륜의 충실한 수호자로 보거나. 전자는 과잉해석이고 후자는 과소평가다. 판소리의 미덕은 어디까지나 인정물태와 희로애락의 파노라마다. 예컨대,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에게 춘향이는 이렇게 대든다. “여보, 사또,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바로 하는 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인데, 음란한 행실 본을 받아 매질하는 것으로 줏대를 삼으니, 다섯 대만 더 맞으면 죽을 터인즉, 죽거들랑 사지를 찢어 내고 굽거나 지지거나 갖은 양념에 주무르거나 잡수시고 싶은 대로 잡수시고, 머리를 베어다가 한양성 안에 보내 주시면 꿈에도 못 잊을 낭군 만나겠소. 어서 바삐 죽여주오.”(이명선 소장본 <춘향가>) 변사또가 질릴 정도로 입담이 세다. 열여섯 처녀아이한테 이런 배짱과 분노가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그 원천은 이념이나 도덕이 아니라 에로스다. 이도령과 나눈 에로스의 향연이 그녀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든 것이다. 요컨대, 사랑의 기쁨과 분노의 파토스는 분리되지 않는다.

효의 아이콘 심청이는 또 어떤가. 눈먼 애비를 봉양하느라 동냥을 다니던 심청은 열두 살이 되자 더 이상 공밥을 먹지 않겠다며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또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는 장승상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인께서 저를 아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믿고 부인께 염치없이 돈을 내놓으라 했다면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부모를 위해 정성을 다할 때, 어찌 남의 재물에 의지하겠습니까? 게다가 뱃사람들과 이미 약속하였으니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제 운명도 이미 정해졌사옵니다. 말씀은 고맙기 그지없으나 따르지는 못하겠나이다.”(완판본 <심청전>) 사람살이의 이치를 완전히 꿰고 있다. 물론 심청이도 죽음이 두렵다. 바다에 뛰어들기 전 뱃전에서 벌벌 떨고 비탄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그냥 ‘건너뛰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겠다는 뚝심이 있었기에 이런 식의 정면승부가 가능한 법이다.

한편, 가난뱅이 흥부는 온갖 날품팔이를 뛰다 매품까지 판다. 매품이란 죄인 대신 곤장을 맞아주는 알바다. ‘인간이 이쯤 되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돌아볼 여유란 없다. 십중팔구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부는 그렇지 않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처마 끝에 쪼그리고 앉아 봄 햇살을 쬐고 있다가 우연히 제비새끼가 다리가 부러진 걸 목격하고는 정성을 다해 치료한다.’(정출헌 <조선 최고의…>) 그 덕분에 박을 탔는데 돈이 쏟아졌다. 요즘으로 치면 로또를 맞은 것이다. 그때 흥부가 하는 말. “돈 봐라, 돈 봐라, 얼씨구나 돈 봐라. 잘난 사람은 더 잘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느냐?” “둘째 놈아 말 듣거라. 건넛마을 건너가서 너의 백부님을 오시래라. 경사를 보아도 형제 볼란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 박흥부를 찾아오소. 나도 내일부터 기민(饑民)을 줄란다. 얼씨구나 좋을씨고.”(박봉술 창본 <박타령>) 대박을 치자마자 자신을 그렇게 냉대한 형님 놀부를 모셔오라고, 또 내일부터 당장 기민구휼에 나서겠단다. 그에게 있어 우애와 증여는 원초적 본능이다. 결단코, 화폐에 대한 욕망과 교환할 수 없다. 버림받은 슬픔, 가난의 설움을 제대로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판소리계 소설에는 이념과 도덕을 훌쩍 뛰어넘는 ‘인생고수’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처한 운명은 가혹하다. 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잠식되지도, 원한에 사무치지도 않는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 과정을 오롯하게 통과한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니까. 그러니 서둘러 해피 엔딩을 향해 달려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희로애락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이 그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행복이란 것도 결국은 이 ‘마주침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 가지 더. 위에서 음미했듯이 판소리계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입담이 끝내준다. 말이 곧 밥이자 무기이며 삶의 비전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소리내어 읽어야 제대로 맛이 난다.

독서에서 소리가 제거되고 말은 카톡으로 대신하고 언어폭력이 횡행하는 우리 시대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언어가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고운 말’, ‘친절한 말’이 아니라 질펀하고 푸짐한 ‘말잔치’가 필요하다는 것, 그 말의 원천은 어디까지나 희로애락의 파동이라는 것, 이것이 판소리가 전해주는 지혜의 보너스다.

고미숙 고전학자

(2014. 10. 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