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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불교는 청춘이다] 2. 부처님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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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3-05 20:58 조회1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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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호 / 2024년 1월 1일자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불교는 청춘이다] 2. 부처님은 청년이었다 



열반, 쾌락·허무 뛰어넘은 청년 싯다르타의 파토스가 맺은 결실

행복하지 못한 청년이 붓다와 조우하는 지점은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35살 성도의 비결은 새로움과 진리 향한 청년의 불같은 열정과 실천
붓다의 깨달음에 접속하는 건 잠자고 있는 우리 안의 청춘 되살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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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복숭아나무 아래서 첫 선정에 든 12살의 싯다르타 태자.
좌대에는 농경제가 조각돼 있다. 페샤와르박물관. 

 

 

#우리가 사는 세상
청년은 우울하고, 중년은 불안하고, 노년은 억울하다. 가장 심각한 건 청년이다. 청년자살 1, 저출산 최하위, 이게 우리 시대의 현주소다. 산업화 세대는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것이 꿈이었고, 민주화 세대는 독재철폐가 시대의 미션이었다. 그 꿈과 미션은 대강 이루어진 듯 보인다. 우리나라는 디지털 강국이 되었고, 시스템과 제도가 전방위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보다시피 무기력과 불안 속에서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장 큰 오판은 물질적 부와 시스템을 행복의 절대적 조건이라 간주한 데 있다
. 자연과 인생, 사람과 사람, 물질과 마음이 단절된 채 좋은 삶이란 불가능하다. 이런 배치는 필연적으로 고립과 소외, 분노를 낳는다. 그래서인가. 요즘 드라마에는 데몬, 슈퍼맨, 괴생명체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초자연적인격체라는 것과 하나같이 엄청난 분노를 장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기력은 분노로, 분노는 마침내 신체의 생리구조 자체를 바꾸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인, 특히 청년들에게 이 풍요로운(?) 대한민국은 차마 견디기 어려운 헬게이트인 셈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 물질에서 마음으로, 소유에서 자유로, 서비스에서 관계망으로! 무엇보다 미래를 담보로 지금, 여기를 외면하는 일을 당장 멈춰야 한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우리 시대가 붓다와 조우하는 지점이다.

#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오래 전 잠깐 미국 동부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불교와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누군가 불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풀이하면 존재는 그 자체로 행복이라는 뜻이다. 몹시 놀랐다. 불교는 삶을 ()’라고 해석하지 않나? 하여 염세주의 혹은 니힐리즘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이런 절대적 긍정은 대체 뭐지?

그 후 시간이 흐르고
5년 전쯤, 비로소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여전히 생초보 단계지만, 사성제, 팔정도, 계정혜, 삼법인, 반야와 공 등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오래 전 머나먼 이역땅에서 마주친 저 아포리즘의 의미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붓다의 다르마의 핵심은 사성제다
. 초전법륜에서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 붓다는 45년간 한결같이 이 다르마를 설파했다. 그 첫 번째는 고성제, 괴로움에 대한 거룩한 가르침이다. 삶은 괴롭다. 이것은 염세주의나 비관론이 아니다. 또 빈곤, 질병, 수난같은 특정한 상황을 전제한 해석이 아니라 존재의 실상 자체를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죽음과, 즐거움은 괴로움과, 사랑은 미움과, 만남은 헤어짐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행복의 지속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집성제, ‘원인에 대한 거룩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런 슬픔의 싸이클을 반복하는가? ‘탐진치가 생로병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탐욕은 오직 증식을 향해 치달린다. 하여 늘 분노를 수반한다. 탐욕과 분노의 무한질주, 그것이 윤회다. 대체 왜?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대한 착각 때문이다. 이것이 무명, 곧 치심이다. 세 번째는 멸성제. ‘소멸에 대한 거룩한 가르침이다. 만약 그 원인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탐진치의 불꽃이 다 꺼진다면? 당연히 모든 괴로움은 소멸한다. 무지와 욕망의 불꽃이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평정과 조화. 곧 열반이다. 이때 행복은 존재 그 자체다. 네번째 도성제는 길에 대한 거룩한 가르침’. , 열반에 이르기 위해 닦아야 하는 구체적인 경로, 곧 팔정도다.

이 네 개의 명제 가운데 핵심은 세 번째 멸성제
, 곧 열반이다. 열반은 탐진치가 일으키는 모든 장애와 구속에서 벗어난 대자유, 그야말로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의 경지다. 놀랍다. 번뇌와 해탈이라는 심오한 비전을 이토록 간결한 명제로 압축할 수 있다니. 붓다는 대체 어떻게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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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
붓다의 깨달음을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한다. 궁극의 보편적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붓다가 만년에 모든 다르마를 완성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를 노년의 종교라 여기는 통념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물론 오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나이는 35. 한창 팔팔한 청년기다. 그 과정을 되짚어 보면, 12살 때 갯복숭아나무 아래서의 명상, 20대에 겪은 사문유관의 충격, 29살의 출가, 6년간의 고행과 깨달음 등으로 정리된다. , 사춘기부터 깊은 고뇌가 시작되었고, 질풍노도의 시기에 성을 나와 숲으로 갔으며, 치열한 모색과 고투 끝에 30대 중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요컨대, 붓다의 다르마는 전적으로 청년기의 산물이다. 초기 승가에 입문한 수행자들 역시 2030세대가 주류였다. 무슨 뜻인가? 당시 인도의 청년들이 진리의 새로운 비전에 목말라 있었다는 뜻이다. 청춘과 구도, 가장 멀리 있는 사항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청춘의 파토스와 진리에의 열정은 깊이 조응한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이다. 먼저, 에로스는 성적 충동이다. 타자와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다이나믹한 에너지다. 싯다르타 역시 그러했다. 왕자의 신분에 완벽한 신체를 갖추고 있었기에 에로스의 열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떤 결핍, 어떤 박탈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평화가 없었다. 평화는커녕 참을 수 없는 환멸이 수시로 밀려왔다. 환락에서 환멸로! 지금 청년들도 그렇지 않을까. 탄생과 더불어 스마트폰이 주어진 우리 시대 청년들 역시 싯타르타 못지 않게 온갖 감각적 쾌락을 다 누리고 있다. 동시에 그것이 불러오는 짙은 허무와 무기력도 충분히 맛보고 있으리라.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싯다르타는 그 환락과 환멸의 한가운데서 질문을 던진다. 쾌락의 절정에서 찾아오는 이 허무와 갈증은 대체 무엇일까? 계속 이렇게 달려가도 괜찮은건가? 등등. 로고스가 작동한 것이다. 에로스가 외부를 향해 치달리는 카오스적 충동이라면, 로고스는 심층에서 솟구치는 의 열정이다. 하여, 그 충동에 방향과 리듬을 부여한다.

열두 살 친경제 때가 시작이었다
. 당시 왕족, 농부, , 벌레, 새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을 목격한 싯다르타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그 순간 왕족들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뒤로 한 채 갯복숭아나무 아래서 생애 처음으로 명상에 들어간다. 모든 존재가 서로를 먹고 먹히는 것이 운명이라면, 이런 세계에서 과연 누가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연민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지극히 고요해졌다. ‘자아가 해체되면서 모든 존재와 일치되는 체험을 한 것이다. 훗날 보리수 아래서 최후의 결전을 감행할 때 붓다는 이때의 체험을 다시 소환한다.

또 하나
, 청년기에 다가온 사문유관의 사건. 문득 노병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자 싯타르타는 청춘의 교만’ ‘건강의 교만’ ‘생의 교만이 산산히 부서지는 체험을 한다. 이런 생애주기를 반복하는 한 행복은 없다. 부자가 되고 왕이 되어 온갖 영광과 쾌락을 다 누린다 한들, 존재는 이 무상함의 파도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

이건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항이다
. 하지만 우리는 질문하기보다 체념해버린다. 아니면 더 과격한 충동에 몸을 맡기거나. 반면, 싯다르타는 존재의 그와같은 실상을 온전히 마주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게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면 분명 그것을 벗어나는 길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이 그로 하여금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해방되는 길, 곧 열반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인류사에 있어 이보다 더 심오하고 전복적인 혁명이 있을까? 그야말로 위가 없고, 더 나아갈 바가 없는 경지다.

#
에로스는 자비로, 로고스는 지혜로!
이 지점에서 꼭 환기해야 할 사항은 이 모든 과정이 청춘의 파토스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시대의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붓다 역시 환락과 방황, 고뇌와 번민을 격렬하게 통과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온몸으로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생명계를 지배하는 먹이사슬에 대하여, 생로병사의 원초적 슬픔에 대하여. 갈애가 고통을 낳는 이유에 대하여. 그 과정에서 청춘의 파토스는 마침내 도약한다. 에로스는 공감과 자비로, 로고스는 통찰과 지혜로! 하여, 다르마는 결코 늙지 않는다. 늘 푸르른 생명의 파동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하여, 붓다의 깨달음에 접속하는 건 우리 안에 있는 청춘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2024
(갑진년)은 푸른 용, 즉 청년의 기운이 요동치는 해다. 물론 시대는 어둡다. 전쟁과 테러, 기후위기, 고립과 갈등이 일상과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부디 이 시대의 먹구름을 뚫고 푸른 용의 기상으로 힘차게 솟아오르기를! 특히 청년들이 외딴 방을 박차고 나와 다르마의 역동적인 파동과 조우하게 되기를!

고미숙 작가
·문학평론가

[1710
/ 2024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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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작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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