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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우주에 나만의 슬픔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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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3-29 09:41 조회35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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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나만의 슬픔이란 없다

이 경 아(감이당)

슬픔은 나의 것

아버지는 4년 전부터 파킨슨과 경도의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다. 최근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걷는 게 조금 불편하고, 잠을 많이 주무시는 것 외에는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간병인과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서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격이 강한 분이었는데 아프시면서부터는 매사에 고마워하며,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되셨다. 이런 변화는 엄마와 오빠에게 더 다르게 다가왔다. 엄마는 평생 아버지 눈치를 보시며 아버지 말에 꼼짝 못 하고 살아오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드럽고 다정한 남편이 되자 그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느끼면서 가슴에 맺힌 서운함을 풀고 계셨다.

오빠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며 나름 열심히 사는 오빠를 늘 못마땅해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오빠는 사업차 만나는 동네 사람들에게서 아버지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다들 아버지 안부를 물으며 아버지에게 신세 진 이야기를 하면서 고마워했다. 오빠는 아버지의 덕으로 사업이 잘되는 것을 느끼면서 아버지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조금씩 풀어갔다. 아버지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운명적으로 느끼셨는지 오빠를 다정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아프시면서 오빠는 그동안 못한 효를 다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졌고 서로 더 늦기 전에 감정을 풀게 되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지난 10월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파킨슨 약 부작용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셨다. 좋아하던 TV를 켜지 못하게 하셨고, 엄마를 의심하면서 식사는 물론이고 약 드시라고 드리는 물까지도 마시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잘 걷지도 못했는데 높은 계단을 훌쩍 뛰어다니셨고, 한밤중에 맨발로 집 모퉁이를 돌며 기도를 하셨다. 또한 당신의 행동을 막으면 공격적으로 변하셨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행동에 우린 너무 당황했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결국은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셨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다행히 안정을 찾으셨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집으로 오실 수는 없다. 병원만큼 아버지를 잘 모실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가족들 모두 슬픔에 빠졌다. 각자가 느끼는 슬픔의 지점이 달랐고 그 슬픔이 자책과 불안으로 흘러갔다. 오빠는 아버지를 병원에 모신 게 아버지를 버린 것 같아 죄의식이 든다고 흐느꼈다. 언니는 아버지가 병원 입원 전날 세탁 세제 봉투를 물어뜯으려는 것을 못 하게 막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니 공격적으로 변하셨고 언니를 때리려고 했다. 그래서 언니는 자기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손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이 일로 언니는 자신이 아버지를 공격했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엄마는 더 이상 아버지와 한집에 있지 않다는 슬픔에 빠졌다. 잠을 못 주무시고, 입에서 침이 나오지 않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불안하셨다. 때마침 아팠던 나에게 당신의 불안을 투사하시며 내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걱정하셨다. 나도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주신 게 너무 많아서였다. 부와 명예를 중시하게 키우기도 하셨지만 남과 나누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이 순간에 나에게 떠오른 건 지난 한 해 외우며 들고 다니던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의 삶과 사상을 다룬 INFINITE POTENTIAL 다큐였다. 다큐의 내용 중 현재의 자아 정체성은 자신의 생각과 몸과 사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사고에서 생기는데, 이런 것들이 다 환상이라는 것, 슬픔은 나의 슬픔이 아니고 인류의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만의 슬픔이라고 여겼던 것이 인류의 슬픔이고, 내 생각을 나라고 여기는 것이 환상이라니 뭔가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이 말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슬픔은 정말 나의 것이 아닌가? 그럼 누구의 것인가? 내 생각이 과연 내가 만들어 내는 환상일까?

양자포텐셜과 파편화된 사고

양자역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세계가 아니다. 우주의 근원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아주 미세한 세계, 원자와 분자, 원자 중에서도 아주 작은 전자와 같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여기서 아주 미세하고 작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의 사이즈가 작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예 다른 층위의 세계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과 중력 등 거대한 우주적 세계를 다룬다. 과학계에서 두 이론은 오랫동안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긴장 상태에 있었다. 봄은 이 점에 대해 두 이론 모두 실재를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보기 때문에 통합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봄이 보기에 두 이론은 뉴튼의 기계론적 질서 즉 입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입자적 세계관에 따르면 전체란 부분들의 상호작용이기에 실재는 독립적인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입자란 안과 밖의 경계가 구분되어 있기에 불연속적이고, 매 순간 특정한 장소를 차지하고, 같은 위치에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관이다. 이에 반해 봄은 실재를 처음부터 분리가 아닌 하나로 연결된 전체성의 관점에서 보았다. 전체와의 관계가 각 부분에 영향을 주기에 단순히 부분들 즉 입자들끼리 상호작용한다고 말할 수 없고, 입자들이 전체 맥락에서 존재하기에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다들 더 작은 입자를 찾고 있을 때 봄은 세상을 부분이 아닌 전체의 차원에서 본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봄은 1952년 발표한 숨은 변수 이론을 통해 두 이론을 연결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숨은 변수 이론에 따르면 양자 입자들이 아무렇게나 우연히 행동하는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파일럿 웨이브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양자 포텐셜이라고 하는 파일럿 파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프로세스로 존재하면서 입자들을 인도하는데, 물질성을 탈각한 잠재태로서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포텐셜의 세계다. 비물질이기에 물질과 달리 경계가 없고, 연속적이며, 시작과 끝이 없는 끊임없는 운동으로 존재한다. 또한, 파동과 달리 매질이 없기에 어디에나 있으면서 동시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양자 포텐셜이 의식 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자체적인 구성능력이 있고, 개별입자에게 전체의 조건과 맥락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별입자란 양자 포텐셜에 의해 구성된 것이고, 아무리 작은 입자라도 전체의 정보를 접고 있으면서, 전체의 일부분을 펼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숨은 변수 이론은 후에 봄의 제자들에 의해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증명되었다.

우리 몸의 세포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양자 포텐셜은 우리의 미세의식 또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은 비물질이기에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도 전체 정보를 접으면서 끊임없는 흐름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배우지 않아도 공기 중에 산소를 골라서 마실 수 있고, 일어난 사건을 인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전체 정보를 접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잠재태인 미세의식을 통해 우리는 전체 정보를 공유하며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세의식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인 현상이 출현하며, 이 현상들은 다시 잠재태로 접혀 들어가는 운동 속에 있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개체는 잠재태의 모든 가능성을 접고 매 순간 다양한 인연 조건에 따라 전체의 일부분을 펼치며 세상에 참여하는, 변형되는 과정 속에 있다.

 

잠재태인 미세의식을 통해 우리는 전체 정보를 공유하며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우린 전체로 연결된 잠재태를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너와 나를 구분하는 ‘파편화된 사고’를 하게 된다. “이러한 구분은 사물이 원래부터 더 작은 구성요소로 나뉘고 쪼개졌다고 보는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각 부분이 원래부터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만일 자기 자신도 이런 식으로 본다면 저도 모르게 자아(ego)의 욕구를 다른 사람들의 욕구로부터 보호하려 들 것이다.”(데이비드 봄, 『전체와 접힌 질서』, 시스테마 20p) 우리는 어려서부터 언어와 교육, 사회적 관습을 통해 이런 파편화된 사고를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라고, 대상도 분리해서 보게 된다. 이로 인해 분리된 세계를 실제로, 나라는 존재를 공간 안에 있는 물체로, 내 생각이나 기억을 전체라고 여기게 된다.

더욱이 파편화된 사고는 자기 자신도 전체에서 분리해서 보게 만들면서 나라는 현재의 자아 정체성 즉 에고를 만든다. 이로 인해 매 순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되어가는 나’가 아니라 내가 만든 고정된 정체성으로 살게 된다. 예를 들어 파도를 나라고 가정해보자. 나라는 파도는 바다와 분리될 수 없고 여러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고 다시 바다로 접히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바다를 알지 못하니 자신을 바다로부터 분리해서 파도로 존재하며 경험하는 것들의 일부분을 자신이라 여기게 된다. 이러한 정체성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파편화된 사고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실상이 아닌 환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만들어진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분리된 중심을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 감정,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욕구를 타자로부터 보호하려 든다. 이것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분리된 사고가 낳는 갈등들

현재의 자아 정체성이 분리된 사고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니 그럼 나는 이 사건에서 어떤 정체성을 만든 것일까? 그동안 나는 분리된 사고를 바탕으로 타자의 슬픔은 타자의 몫이라 여겨왔기에, 당연히 나의 슬픔도 나만의 것이었다. ‘나’만의 슬픔이라고 슬픔을 규정하자 이런 분리는 자연스럽게 나라는 중심을 만들며 나의 슬픔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내가 전체를 향해 쏜 화살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슬픔을 보호받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웃고 떠들면 지금 외할아버지가 아프신데 너희는 뭐가 그리 신나냐고? 물었다. 그 바탕에는 내가 슬프니 너희도 슬퍼야 한다는 강요를 깔고 있었다.

가족들도 다들 자신의 축적된 기억정보와 경험에 따라 에고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오빠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병원에 버린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고 계셨고 오빠는 누구보다 효자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슬픔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일에 대해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자신만큼 적극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마치 죄의식을 보상하려는 듯이 더 비싸고 시설 좋은 병원을 알아보러 다녔다.

언니는 지난 시절 주식 문제로 부모님께 많은 걱정을 끼쳤기에 아버지 건강에 대한 자책이 있었다.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공격을 손으로 막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고, 아버지를 공격한 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었다. 정신이 없는 무의식만 남아있는 상태의 아버지에 대한 자기방어는 당연했는데도 계속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을 보호하고자 작은 작은올케가 아버지에게 빨리 가보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분리된 사고는 어느덧 갈등을 낳고 있었다. 엄마는 혼자 남겨진 당신의 불안에 에고를 결합시켰고 그것을 나에게 투사했다. 그런데 이런 불안이라면 오래갈 것 같은데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네가 강원도에 여행 가자고 하니 흔쾌히 따라나서셨다. 이건 뭔가? 병원을 매일 드나드실 것 같았고 눈물로 밤을 계속 지세우실 줄 알았는데 엄마는 여행을 즐겁게 다녀오셨다. 불안도 엄마가 만들어 낸, 신체적으로 영향을 끼친 생생한 환상이었다.

 

슬픔은 인류의 것

파편화된 세계관이 아니라 잠재태로 연결된 전체성의 관점에서 내 슬픔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슬픔이 과연 나만의 것일까? 실재는 전체이자 하나인데 어디까지가 나의 슬픔이고 남의 슬픔일까? 나와 너의 슬픔이라고 경계 지을 수 없다. 타자의 슬픔도 나의 것이고, 나의 슬픔도 타자의 것이자 인류의 것이다. 슬픔이든, 사랑이든, 어떤 결과물이든 나의 것이라고 구분 지을 수 있는 건 없다. 우주에 나만의 슬픔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공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일이 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은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것이며,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것이여야 한다. 나의 행동은 전체를 향하고 전체에서 영향을 받기에 전체를 오염시킬 수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끼친 영향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슬픔을 보편적인 거라 여기니 여전히 슬프지만 나를 슬픔에 빠진 존재, 또는 나의 슬픔이라고는 규정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런 정체성이 진짜였다면 여전히 영향을 받을 텐데 내가 이것을 알아차리자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슬픔이 옅어졌다. 주변의 슬픔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조금씩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큰 올케와 동서, 둘 다 치매에 걸린 친정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신지 오래되었는데 나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했다. 그래서 큰 올케와 동서에게 그동안 신경 못 써서 미안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아버지에게 가장 이로운 일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집에서 멀어서 가족들이 면회 가기도 힘든 시설 좋고 비싼 병원을 알아볼 게 아니었다. 거기에 가더라도 아버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생을 정리하는 과정이 편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의 특이한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삶이 이렇게 폭력적이고 두려움에 처해 있었나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인 폭력성과 강한 두려움은 인류가 공통으로 접고 있는 것이고 정신이 있을 때는 이것을 컨트롤할 수 있지만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안정을 찾으셨는데 이런 폭력성과 두려움은 어디로 간 걸까? 이것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다시 잠재태로 접혀 들어갔다. 그러다 어떤 조건이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질 것이다. 아버지는 전체와 연결된 의식 속에서 일부분을 펼치며 변형되어가는 존재로 계셨다. 그리고 계속 변형을 거치면서 물질에서 비물질의 세계로 접히고 다른 물질로 펼쳐지는 과정에 계실 것이다.

지금은 조금의 시간이 흘러 덜해졌지만 해결되지 못한 오빠의 죄의식과, 언니의 죄책감, 엄마의 불안은 비슷한 사건을 만나거나 특정 조건이 되면 언제나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기억정보에 접혀있기 때문이다. 자아 정체성은 우리가 분리된 사고를 하는 한 계속 생겨나기 마련이고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전체성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갈등 또한 계속될 것이다. 나에게 이번 사건은 파편화된 사고가 만들어 낸 나만의 슬픔에서 벗어나 전체로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공부로 변주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와 가족들이 어떤 에고를 만들고 부침을 겪으며 변해가는지를 관찰 중이다.

 

전체성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갈등 또한 계속될 것이다.
댓글목록

깨몽님의 댓글

깨몽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