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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길, 붓다의 길] 인트로. 왜 왕과 붓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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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3-08 10:40 조회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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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왜 왕과 붓다인가?

왕의 길, 붓다의 길 –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인트로. 왜 왕과 붓다인가?

김 주 란

누가 들었을까?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불경에 관한 것이다. 불경이란 붓다께서 설하신 진리의 말씀을 담은 거룩한 책이다. 그런데 불경에는 붓다만 등장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얘기일까? 붓다야말로 상대의 처지와 심리상태, 지적 수준 등을 고려한 맞춤형 대화, 이른바 ‘대기설법’의 달인! 붓다의 맞은편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누굴까? 그는 어떤 문제로 붓다께 찾아왔을까? 무슨 복이 있어 붓다의 말씀을 듣는 행운을 누렸을까?

붓다와 동시대를 살았던 행운의 주인공들은 정말 다양하다. 창녀, 살인자, 귀족, 사냥꾼, 학자, 광인, 왕과 왕자들 등등. 그뿐 아니라 인간 아닌 비(非)인간- 여러 층위의 천계에 사는 다종다양한 천신, 야차, 마라 등도 자주 출몰한다. 코끼리, 원숭이, 사자, 뱀, 까마귀, 사슴, 물고기 등의 동물 등이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찮다. 아, ‘나무’를 빠뜨리면 안 된다! 붓다의 탄생을 도운 산파로, 정각(正覺)의 수호자로, 열반을 지켜본 목격자로서 나무는 붓다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늘 함께 해왔다.

이들은 각각의 사연과 저마다의 질문을 품고 있다. 우리처럼 말이다. 그 가운데에는 가르침을 듣기 위해 긴 세월을 기다려온 자도 있고, 토론에서 이겨 붓다를 꺾으려는 마음으로 온 자들도 있다. 먼길을 찾아온 자도 있고, 붓다께서 직접 찾아간 자도 있다. 붓다를 위협한 코끼리도 있고 붓다 곁을 떠나야 하는 슬픔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코끼리도 있다. 말씀을 듣고 단박에 깨우친 존재들도 있고, 화를 내며 떠나버린 자들도 있다. 붓다와 동시대를 살고, 붓다와 직접 인연이 닿았으되 그 양태는 천차만별인 것이다.

왕, 불경의 중요 등장인물

이 중에서 우리는 앞으로 왕과 붓다, 붓다와 왕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인연 가운데 ‘왜 하필 왕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우리 현대인이 떠올리는 왕과 붓다의 만남이란 아마도 미국 대통령과 달라이라마의 회견 류의 것이리라. 그런 만남은 일회적 이벤트에 가깝다. 하지만 불경에 묘사된 왕과 붓다의 만남은 일회적이 아니라 일상적이다. ‘아니 뭐 이렇게까지 자주?’ 싶을 만치 왕들은 정말 곳곳에서 높은 빈도로 불경에 등장한다.

그러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붓다는 어떻게 사셨을까?’ 같은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만약 현대의 직업 중에서 붓다의 활동과 가장 통하는 일을 고른다면 ‘교육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5세 깨달음에 이른 후 80세 열반에 드신 마지막 순간까지 듣고 가르치고, 묻고 가르치고, 말해보라 가르치는 것이 그분의 일이셨다. 가르침 또한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 배우려는 사람이든 따지려는 사람이든 사람부터 만나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늘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에 머무셨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도시와 가까운 숲이 그분이 선택한 거주처였다.


만약 현대의 직업 중에서 붓다의 활동과 가장 통하는 일을 고른다면 ‘교육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많은 큰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상공업의 중심이자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이며 철학과 학문의 중심이다. 그리고 당시 도시의 주인공이 바로 왕이었다. 보다 앞선 시대의 주인공은 유서 깊은 가문의 사제들이었고 제조업자들과 무역상인들 또한 무섭게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이천육백 년 전 북인도의 대표는 왕이었다. 왕의 역할은 전차에 올라 칼을 들고 나라와 도시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들은 정복 군주, 사법관, 행정가인 동시에 전사였다. 전사란 생사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당대의 왕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깨달음을 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붓다의 출현에 누구보다 열광했다. 붓다를 찾아와 가르침을 접한 왕들은 곧 붓다의 ‘빅 팬’이 되었고 가능한 자주 붓다를 뵙고 싶어했다. 그 결과 왕들은 오늘까지 불경 안에서 놀라운 분량을 뽐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만큼 광활한 불경의 팔만사천법문 가운데 하나의 테마로서 ‘왕과 붓다’를 택해보는 것도 괜찮은 출발지가 아닐지.

 

두 가지 예언

그리고 우리가 왕과 붓다에 대해 알아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어쩌면 이쪽이 더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다. 앞서의 ‘왕’은 붓다의 신실한 제자이자 후원자로서 붓다께 설법을 요청하는 현실의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왕’은 ‘붓다’의 안티테제로서의 왕이다. 왕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뭇생명의 기본욕구를 실컷 누릴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반면 붓다는 그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왕과 붓다의 길은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이는 탄생의 순간부터 그러했다. 히말라야 산맥 아래 자리한 작지만 용맹한 부족 공화국의 후계자로 태어난 미래의 붓다 싯다르타, 그 아기왕자는 뛰어난 금세공사가 화로에서 정련해낸 순수한 황금같은 빛을 뿜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부족의 현자들은 깊은 환희심으로 전율하며 왕자의 앞날을 이렇게 예언했다.

 

“집에 있으면 세계를 지배하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집을 떠나면 세상에 진리의 빛을 가져오는 위대한 스승이 될 것입니다.”

 

찬란한 황금빛-이 빛은 영지체 모든 면에서 최상의 자질을 갖춘 존재임을 나타내는 징후이다-으로 빛나는 이 아기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붓다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 예언을 보면 다른 길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되는 길이었다. 역사상 당시 인도는 전통적인 부족 국가들이 강대국에 의해 흡수 통합되면서 제국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붓다 재세시 인도 아대륙에는 16개의 나라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 나라들은 곧 4개의 나라로, 그리고 다시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병합될 운명 앞에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란을 막고 번영을 이룰 왕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차차 살펴보겠지만 이 선택은 실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것도 매우 오래된. 그럼에도 ‘왕’이 되어달라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유혹과 애원은 붓다의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중요한 순간마다 출현한다. 때로는 아버지와 친척의 목소리로, 때로는 마라의 목소리로 찬탄하고 협박한다.

우리는 어떤가? 붓다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왕’에 대한 미련과 기대가 여전하지 않은가? 제도로서의 왕은 거의 사라졌지만,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지존의 권력자로서의 왕이라면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 결과 우리는 놀랍게도 모두가 왕 못지 않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물질적 풍요는 전지구적 환경파괴와 극심한 우울증을 낳을 뿐,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로부터는 더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이것이 왕과 붓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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