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 감이당을 만났고 이옥의 글을 만났다. 이옥의 글을 처음 만난 건 낭송을 통해서이다. 산으로 공원으로 걸어 다니며 수없이 소리 내어 읽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만나는 사물 하나하나에 온전히 마음을 다 주고 흘러넘치듯 감정을 드러내는 그의 글이 나를 흔들었다. 이옥의 글을 낭송하다 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리고 몸도 편해지곤 했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닐 때 봄마다 벚꽃나무의 꽃비를 맞고 집에 돌아가곤 했다. 꽃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단한 나를 토닥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 시절처럼 이옥의 글이 그렇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 안에 오랜 시간 억눌려놓았던 자잘하고 세밀한 감정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이옥의 글에는 사람, 나무, 풀, 새, 벌레 등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선비들이 몰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저잣거리 민중들의 삶과 생활 주변의 자잘한 사물에 주목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섬세하고 마음껏 드러내는 글을 썼다. 그는 우연히 꺾어 본 수숫대 속의 작은 벌레를 통해 우리의 삶을 말한다. ‘즐겁구나, 벌레여! 이 사이에서 태어나 이 사이에서 자라고, 이 사이에서 기거하며 이 사이에서 먹고 입고 하면서 장차 또 이 사이에서 늙어가겠구나.’라며 그 자체로 충분히 편안하고 충만한 삶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서는 사람도, 사물도, 한낮 미물인 벌레까지도 살아서 꼬물거리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옥의 글을 통해 내 모습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20년간 거대한 이상을 쫓아가느라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작은 감정들을 억누르고 외면하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억눌린 감정은 뭉쳐서 분노로 표출되어 내 몸을 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뭉치고 막힌 감정은 같은 패턴의 삶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다른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마주치는 것들과 섞여서 이전과 다른 나를 마주하는 것, 그것이 곧 다른 세계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내가 이옥의 글을 읽는 이유는 미물인 벌레까지도 살아서 꿈틀거리게 하듯, 그의 글이 내 마음을 흔들고 스며들어 나를 한 뼘씩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