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카톡에 후배의 부고가 왔다. 복막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게 삼 개월쯤 전이었다. 대충 삼십년 전쯤 될까. 아이들을 키우며 친목모임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이후 간간이 통해서 소식은 듣고 있다가 이곳 연구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론 거의 잊고 살았다. 그는 나보다 서너살 아래였다. 딸의 결혼날짜까지 잡아놨다고 했다.
처음 후배의 발병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고 가슴 아팠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곤 솔직히 바로 돌아서선 잊어버렸다. 코앞에 닥친 내 일들에 온통 정신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을 때 나 자신에게 화들짝 놀랐다. 어쩌면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동시에 나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하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몇 년간 연락도 하지 않던 내가 새삼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었다. 어쩌다 생각날 때마다 어서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러다 부고를 접하게 된 것이다.
법구경 인연담 속 주인공들은 어떤가. 가족을 모두 잃고 정신줄을 놓쳐버린 빠따짜라,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죽은 아이를 들쳐 업고 살려 달라 헤매고 다닌 끼싸고따미,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들의 일상은 그 순간 정지되었다. 그들은 이후 더 이상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마음의 행로를 겪는다.
난 이들 주인공과 달리, 돌아서서 보통 때와 다름없이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부처님처럼 죽음의 문제에 담담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후배와 내가 애착으로 형성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착은 신체적인 것이다. 신체가 연결된 만큼의 강도와 애착의 정도는 같이 간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손녀… 당연히 그 중심에 ‘나’가 있다. 애착의 최종 심급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애착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