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은 여백이 참 많은 텍스트다. 그래서 해석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걸 채우는 과정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삶의 이치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뇌지예는 기쁨을 만났을 때 우리가 보이는 다양한 모습을 통해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기쁨을 오래도록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괘상을 보면 땅을 상징하는 곤괘가 아래에, 우레를 상징하는 진괘가 위에 있고, 사효만이 유일한 양효이다. 정이천은 이를 “양이 땅 속에 잠재해 감춰졌다가 진동하여 움직여, 땅 속에서 나와 그 소리를 떨쳐 일으키니, 소통하여 펼쳐져서 조화를 이루어 즐겁기 때문에 열광”이라고 풀이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같은 생각이 잠재해 있다가 누군가 소리쳐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거리로 뛰쳐나와 그 마음을 서로 나누며 기쁨에 겨워 소리치는 군중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괘사[利建侯行師]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제후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이롭고, 군대를 출동하는 것이 이로운 상황일 때, 백성들이 역시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기질을 가졌든 중정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열렬히 이에 호응하는 모습, 그것이 기쁨이자 열광이라고. 요컨대 진정한 기쁨의 필요충분조건이 오랜 숙성의 시간,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 소통, 펼침, 조화라는 것이다.
이런 기쁨의 상황인데 효사로 들어가면 뜻밖에도 길한 효가 이효 하나밖에 없다. 열광하며 큰소리를 내는 초효에게는 흉하다 하고, 사효를 쳐다보고 있는 삼효에게는 후회가 있을 거라 한다. 모두 다 호응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운명이 갈리는 건 왜이며, 이 열광이 ‘여유롭게 즐김’으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유일하게 길한 이효를 바탕으로 그 이치를 알아보자.
다시 괘상을 보면, 모두가 호응하는 사효의 기쁨은 충동적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순종의 미덕을 가진 곤괘를 다 통과한 연후, 즉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그 이치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고,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저절로 터져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효는 이런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사효와 응을 하는 자리에 놓인 덕분에 그의 총애를 받게 되자 너무 좋다고 소리부터 질러대는 형국이고, 삼효는 초효보다는 뜸이 들었지만 아직은 시간이라는 지층을 더 견뎌내야 안으로부터 기쁨의 소리가 터져나올 텐데 조급하게 사효를 쳐다보며 나누어 달라 하고 있다. 둘 다 사효의 그 기쁨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는 이치를 탐구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걸 다른 이들과 나누겠다는 마음의 여유도 없다. 결국 기쁨을 만났을 때 취하는 그들의 태도가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