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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대중 – 다들 그렇게 살잖아 (3)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20-10-06 10:49
조회 : 107  

2부 약자가 살아가는 법 - 2)

근영(남산강학원)

니체에 따르면, 유일무이성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고독’. 이때 고독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독, 그러니까 단지 혼자 있다는 의미에서의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적어도 니체에게는, 삶의 근원적 모습과 맞닿아 있다.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다시 말해, 내 삶을 조금이라도 대신해 줄 수 있는 누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알려줄 누군가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까! 유일무이하니까! 해서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내 삶은 ‘내’가 살아야 하고, 삶의 가치 역시 ‘내’가 만드는 수밖에는 없다.

유일무이성과 고독은 존재의 양면이다. 그럼에도 그 둘이 주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유일무이성이 왠지 뿌듯한 느낌을 준다면, 고독은 어딘가 꺼려지는 데가 있다. 하지만 유일무이성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고독 또한 함께 받아 안지 않을 수 없다. 고독은 빼고, 존재의 독특성만 갖는다? 그렇게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거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안 되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 고독이 무섭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대충 어딘가에 기대어 살 수 있었으면 싶은 것이다. 내가 하는 이상한 짓은 살짝 넘어가고, 반대로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하지 않았어도 내 몫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 묻어갈 데가 필요하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숨을 만한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리 중의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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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무섭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리가 됨으로써 여러 가지 수고를 덜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대신 대세에 따르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판 위에서 누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 그러다 행여 일이 꼬이면? 그럴 때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며 은글슬쩍 넘어가거나, 넘어갈 수 없으면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대세라 한들 어떻게 그것이 곧 내 삶의 양식이 될 수 있을까. 어찌 다른 이들이 깔아 놓은 판이 내 삶의 무대가 될 수 있을까. 다른 걸 다 떠나서, 잘못된 그 일을 자기 자신은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숨길 수 있다는 걸까. 그건 “자신의 구원을 여론, 사적인 나태”에 걸고 있는 거다.

물론 그런 나태 덕분에 진짜로 속이 편해진다면야 게으르다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그따위 유일무이성쯤은 내던져 버리고 사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상황이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간다는 데 있다.

무리가 되는 순간, 우리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왜일까? 이제는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무리가 어떤 생각하는지를 항상 미리 계산하고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하는 것. 게다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까 마음은 불안불안하다. 고독이 무서워서, 대충 뭉개며 좀 편해져 보려고 무리로 도망쳐 들어갔건만……웬 걸, 무리가 고독을 대신해 우리에게 두려움과 수고로움을 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무리 속의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진창으로 빠져들어 간다. 인정 욕망에 발목을 잡힌 채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신경은 주변에 가 있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가 삶의 중심이 된다. 행여 책잡힐까 행동 하나 하기가 무섭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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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욕망에 발목을 잡힌 채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고독으로부터의 도주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더 큰 두려움과 더 큰 수고로움이다. “의견과 공포의 사슬”에 묶여서, “자신의 창조력을 회피하고 왼쪽, 오른쪽으로, 앞으로, 뒤로 온 사방을 힐끔거리는 인간”. 니체는 말한다. 이렇게 사는 한, 그들에게 행복을 돌려줄 방법은 없다고.

우리 자신도 상황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 무리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하지만 그럼에도 무리본능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아닌 줄 알지만, 계속해서 힐끔거린다. 왜 때문에?

잠시 차분히, 다시 상황을 파악해보자. 사실 앞에서의 물음은 방향이 정확하지 못하다. 우리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무리를 따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즐겁다고 느끼는 그 일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리 속에서 괴로운 건 맞지만, 그 괴로움보다 더 큰 무언가를 우리는 무리에서 얻고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무리가 주는 만족! 바로 여기가, 우리가 아닌 줄 알면서 하는 그 일을 멈출 수 있는 출발선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무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있을까? 우리는 ‘다들’이라는 말로 무엇을 얻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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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리 속에서 괴로운 건 맞지만, 그 괴로움보다 더 큰 무언가를 우리는 무리에서 얻고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다들’이 주는 편안함

약자가 출현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봐야 하는 순간이다. 언제나, 혹은 대개 그렇다. 약자는 정직함과 솔직함 앞에서 무력하다. 자신이 상상하고 원하는 멋진 자신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약자는 차라리 그것을 가려서 마치 없는 것처럼 만들려 한다. 잡티하나 없이 뽀샵 처리된 사진처럼?! 약자의 덕, 자기 합리화다.

고독에 관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고독 앞에서 두려움과 나태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이번 생이 처음이니까.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자연스러움이 몹시 거북하다. 눈앞에서 치워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올라온 그 마음들에, 고독이라는 삶의 바탕에, 등을 돌리게 된다. 약자가 되는 순간이다.

약자는 고독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도망치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단을 찾는다. 그리고 그 궁리 끝에 나오는 묘책 하나! ‘나’에서 ‘다들’로 주어 바꾸기! 거기서는 문제가 ‘다들’로, 모두의 것으로 환원되니,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 드러내는 일은 저만치 미뤄둘 수가 있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약자는 종종 어떤 일을 하면서 마뜩찮은 듯 말하곤 한다. 다들 하는데, 나만 안 할 수도 없고……. 약자는 말하고 싶은 거다. 지금 이 행동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자신은 그 일에 책임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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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고독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도망치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단을 찾는다.

약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무언가 감당할 일이 줄어든 기분이랄까. 게다가 일이 잘못되면 남 탓을 할 수 있는 여지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처럼 약자이기에 ‘다들’은 자신이 겪어야 할 일들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하지만! 약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한 번만 생각해 보자. 자신이 한 행동의 주어가 ‘다들’이 되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자기 행동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이 된다는 것 아닌가. 남 탓을 할 때도 그렇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어필하고 싶어서 한 말이겠지만, 그것 또한 그 ‘남’이 내 행위의 원인이라는 거다. 요컨대, 그것은 내 행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소리다. 마치 노예의 모든 행동이 주인에게서 비롯되듯이 말이다. 결국 ‘다들’을 주어로 삼을 때, 약자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약자는 정말이지 하나만 안다.–;;

약자가 ‘다들’을 통해 마음이 편안해지는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다들’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경우. 저는 상관없는데, 다들 그걸 바란다네요, 라는 식. 여기서 ‘다들’은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효과를 갖는다. 해서 약자는 자기 의견의 부족함을 ‘다들’이라는 숫자로 메우려 든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고, 그 자체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여겼을 때, 다들이라는 말을 써서 타당성을 확보하려 드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식의 화법은 자신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들리게 만든다. 내가 그러고 싶은 게 아니라, 객관적 상황이 그렇다는 식의 뉘앙스를 주는 것. 신문의 저널리즘이 보여주던 바로 그 화법이다. 그리고 이 화법의 또 다른 달인이 있다. 정치인들! 그들이 툭하면 입에 올리는 말. 국민의 뜻을 받들어, 어쩌구 저쩌구……. 그럴 때 국민은 대체 누구일까? 나는 국민이 아닌가? 그건 국민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은 아닐까?

정치인들에게 이런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은 단지 자기 생각을 국민의 뜻이라고 포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른 마음을 읽고 있는 거다. 국민이라는 말로 자기 사심을 포장해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 탐욕.

탐욕의 위장술로 ‘다들’을 쓰는 것은 정치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에 말했던 입시 문제만 해도 그렇다. 분명 우리나라 교육은 잘못 돌아가고 있고, 이러다가는 아이들의 삶도, 사회도 완전히 망가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그래도, 내, 아이만큼은, 스카이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번듯한(=취업 잘되는) 과에 진학하면 좋겠다! 머리로는 알지만 도무지 포기가 안 되는 그 욕망, 거기에서 ‘다들’이 등장한다. 다들에 떠밀려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서서, 자신의 욕심을 가리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모양새는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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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에 떠밀려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서서, 자신의 욕심을 가리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모양새는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약자에게 ‘다들’은 이처럼 다양한 용법을 갖는다. 어떤 것이든 약자는 무리를 통해 고독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보기 싫은 자기 면모를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그러니 무리, 그것은 약자에게 편안함이요, 구원이 아니겠는가.

여러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나라와 민족을 직접 본 여행자에게 가는 곳마다 다시 발견했던 인간의 특성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모두에게 게으른 습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많은 이들은, 그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겁이 많았다고 대답했다면 더 옳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풍속과 의견 뒤에 숨는다. 자신이 단 한 번,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이상한 우연도 두 번씩이나 그토록 기이하게 다채로운 갖가지를 뒤흔들어 섞어 그 같은 하나의 존재를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나쁜 마음인 것처럼 그걸 숨긴다. 왜? 이웃이 무서워서. 인습을 요구하고, 온통 인습에 휩싸여 있는 이웃이 무서워서. 이웃을 무서워하라고, 무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그리고 스스로 즐거워하지 말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중 몇 명의 특이한 사람들은 부끄러워 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편안함이요, 타성이며, 요컨대 여행자가 말했던 게으른 습성이다. 그는 옳았다. 인간은 겁도 많지만 그보다 더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조건적인 정직성과 솔직함을 강요할지 모른 부담감을 가장 무서워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역, 책세상,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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