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전히 이상하다. 여기까지 왔지만, 데카당스에 담긴 두 모습, 쇠락한 생명력과 퇴폐적 취향의 조합이 영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가. 기력이 너무나 쇠해서 삶이 무가치할 정도라면, 조용히 쉬는 게 맞다. 그런데 데카당스는? 쉬기는커녕 향락을, 그것도 더 센 자극을 줄 수 있는 퇴폐적인 쾌락을 찾아 헤맨다.
‘인생 별 거 없어’와 ‘즐겨’라는 연결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무가치한 삶인데, 그래서 뭘 해도 허망하기만 한데, 왜 즐기는 것에는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일까. 어째서 감각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일만은 그 허망한 일에 들어가지 않는 걸까.
니체씨는 말한다. 병약한 생명력과 향락은 결코 모순적이지 않다고.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무슨 말일까. 니체에 따르면, 생명력은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명력이 병약하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빠져드는 거다.
퇴폐적 취향은 생명력이 병약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들은 생명력이 퇴화되었기 때문에 자기 생명에 진정 이로운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오히려 해로운 것에 끌리고, 해로운 것을 한다.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건강한 생명은 유익한 게 맛있는 반면 병약한 생명에게는 해로운 게 맛있다! 이것이 데카당스가 활력이 아닌 환락을 택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