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신을 찬양하는 호칭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많이 쓰는 호칭 중 하나가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다.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란 하늘에 계시면서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존재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정의로운 심판자, 잘못하면 엄하게 꾸짖는 무서운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 덕에 편하게 먹고 사는 자식들 등등 이런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거룩하다는 의미가 뭘까? 나는 기도 때마다 거룩하신 신을 찾고 불렀지만, 막상 신의 거룩함이 무엇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신의 거룩함이란 초월적으로 존재하면서 만물에 베푸는 신의 사랑이나 은총 같은 것으로 여겼다. 나는 신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과 떨어져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기적과 계시를 통해 만물을 다스리고, 만물에 관여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니 신은 저 위에, 나는 이 아래에 존재하며, 신의 은총으로 내가 별 탈 없이 살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신이 만물에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나도 주변에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고 남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봉사를 안 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여겼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봉사는 내가 신에게서 받은 사랑을 남에게 나눈다는 의미가 있었기에 가능한 한 기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봉사 현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봉사하는 곳은 갈등이 없고 서로 양보하며 지내는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직장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그 안에는 늘 반목과 이기심이 넘쳤다. 반목의 한가운데에는 사제에 대한 쟁총 경쟁이 있었다. 사제를 신의 대리자로 생각하니 사제의 눈에 더 들려고 하고, 사제에게 관심과 사랑을 더 많이 받으려고 했다. 사제의 관심 정도가 신의 사랑의 표지라고 여겼다.
우린 입으로는 형제님, 자매님을 외치지만 그건 말뿐이었다. 각자 자신이 신의 사랑 또는 사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또는 사랑을 더 받겠다는 욕심이 있었기에 봉사를 할수록 화합이 아닌 반목이 계속되었다. 서로 자기를 내세우고 싸우지만 미사 때는 각자의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기도했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아마도 마음속으로는 네 탓이요)를 외쳤다. 그럴 때마다 궁금했다. 대체 거룩한 신은 어디에 계시고 이럴 거면 봉사를 왜 하는 걸까?
나도 그랬다. 사제에게 잘 보이는 게 신에게 잘 보이는 거라고 착각했기에 봉사할 때도 사제 눈에 들려고 했다. 그래서 사제의 사랑을 두고 일어나는 봉사자들 간의 질투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사제랑 친한 사람을 보면 신이 예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나는 나고 타자는 타자였기에 봉사도 별개의 존재들이 모여서 자신이 받은 소명과 사랑을 실천하고 신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나와 신과의 관계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했다. 신을 섬기면서도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신을 섬긴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신의 거룩함이란 무엇인지, 신과 나는 무슨 관계이며 나와 타자는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