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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보다 죽음에 처하는 것이 어렵다-사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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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미 작성일13-06-19 16:19 조회13,852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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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보다 죽음에 처하는 것이 어렵다
- 사마천의『사기열전史記列傳』
 
정경미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知死必勇 非死者難也 處死者難
- 『사기史記』「염파 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중에서
 
 

인상여와 화씨벽
 
상여의 집에는 네 벽밖에 없었다! 부잣집 과부 탁문군卓文君을 달밤에 거문고 연주로 꼬드겼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인상여藺相如이다. 그래서 이름도 인상여의 이름을 빌려와 사마상여라고 했다. 도대체 인상여는 어떤 인물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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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전국戰國시대 말기, 진秦나라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때이다. 진나라는 이웃인 조趙나라에 귀한 보물-화씨벽和氏璧(화씨和氏가 발견한 구슬이라고 해서 화씨벽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옥玉)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냥 뺏기는 창피하니 화씨벽을 주면 진나라의 성 15개를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일 뿐 진나라는 화씨벽만 얻고 성을 주지 않을 것임을 조나라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두 눈 번히 뜨고 국보를 빼앗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주자니 깡패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다. 진나라를 못 믿지만 그렇다고 진나라의 제의를 무시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조나라. 이때 조나라의 사신으로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에 갔다가 다시 무사히 화씨벽을 가지고 돌아온 공신이 인상여이다. 완벽귀조完璧歸趙 : 화씨벽을 온전하게 조나라에 가지고 돌아오다.  완벽完璧’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인상여는 대단히 지혜로웠다. 조나라의 왕이 못 믿을 진나라에게 화씨벽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인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화씨벽을 줬는데 성을 안 주면 잘못은 약속을 안 지킨 진나라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화씨벽을 안 주겠다고 하면 대화를 거절한 조나라에 잘못이 있게 됩니다. 제가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에 가서 약속 대로 성 15개를 받아오겠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화씨벽을 온전하게 다시 조나라로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상여는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에 가게 되는데. 진나라는 물론 화씨벽을 받고는 성을 주겠다는 약속 따위는 무시한다. 깡패한테 물건을 뺏긴 어린애의 형국. 어떻게 할 것인가. “내 꺼 내놔라” 하자니 주위에 전부 ‘어깨’들이 둘러서 있다. 보통은 이때 “헹님들 살려주십쇼”하면서 뺏긴 물건은 포기하고 줄행랑을 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인상여는 용맹했다. 약소국의 일개 무명 사신이 천하의 진나라의 왕과 대신들로 둘러싸인 속에서 온 나라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통을 친다. “대국의 체통으로 이게 무슨 짓이냐! 약속 대로 성 15개를 주든가, 아니면 화씨벽을 당장 내놓아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버리겠다고 인상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기둥을 붙들고 거기에 정말 머리를 갖다 박을 듯이 들이민다. 이때 인상여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머리털이 우뚝 치솟아 머리에 쓴 관이 들먹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 기세에 주위에 둘러선 어깨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쟤 빨리 물건 줘서 보내라”고 한다. 진왕은 인상여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화씨벽을 돌려준다.
 

죽음을 아는 용기
 
사지死地에서 칼 한 번 쓰지 않고 담판을 지은 인상여의 용기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마천은 이것을 ‘죽음을 아는 자의 용기[知死必勇]’라고 하였다. 약소국의 일개 무명 사신으로서 적국敵國의 군신들로 둘러싸였을 때 인상여의 심정은 이러했으리라. “죽기밖에 더하겠냐[勢不過誅]!” 싸움을 할 때 반드시 덩치 크고 힘센 놈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죽기살기로 매달려서 싸우는 놈이 이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죽는 걸 겁내지 않는 놈이 이긴다. 진나라와 담판을 벌였던 인상여가 바로 이 경우이다. 인상여는 “애초에 이건 이기지 못 할 싸움이야” 하면서 진나라에 안 갈 수도 있었으리라. “힘에 밀려서 도저히 안 되겠어” 하면서 화씨벽을 빼앗기고 빈 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는 적국의 중심에서 천하를 호령했다. 이 호령으로 적들을 제압했다. 죽을 자리를 피하지 않음으로써 죽을 자리에서 살아났다.

인상여의 용기는 생사生死를 넘어선 도道에 대한 절박한 물음에서 나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이치에 대한 물음. 힘으로 남의 걸 빼앗는 건 야비한 짓이다. 그것도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인상여는 힘만 믿고 야비한 짓을 하는 진나라에게 “이것이 정말 천하의 올바른 도인가”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사기史記』 전체를 일관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그런데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의로운 인물들은 왜 고사리나 캐 먹다 굶어 죽어야 하는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는 도척盜跖의 무리들은 어째서 무병장수 하는가? 그렇다면 세상에 정말 천도天道라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과연 인도人道와 합치되는가? 이런 물음으로 사마천은 사기 열전 편을 시작하고 있다(「백이열전伯夷列傳」).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닿아 있다. 생사生死를 관통하는 이 물음을 삼황오제三皇五帝 때부터 한漢나라 때까지 이천 년 중국 역사의 각계각층 인물들의 삶을 통해 묻고 있는 것이 『사기史記』라는 책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백이 숙제는 권력을 탐내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굶어 죽었다. 권력을 탐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의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그들은 과연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채미가采薇歌」를 전하면서 사마천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왕권 따위… 부패한 세상을 욕하면서 자신의 고결함만을 지키려고 했다면 그 교만은 왕권에 대한 탐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때 그들을 과연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사마천은 백이 숙제를 의롭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절묘한 지점을 포착함으로써 복잡한 상황을 하나의 단순한 답으로 환원하지 않고 상황 자체가 새로운 질문이 되도록 한다. 이 ‘질문의 자리’가 바로 ‘죽을 자리[處死者]’이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이런 저런 판단 이전에 그 상황과 직면할 용기! 이 용기에서 주어진 상황을 넘어설 힘이 나온다고 사마천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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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자리에 서라! 그래야 살 방도가 나온다! 이것은 한신韓信이 조趙나라와의 전투에서 쓴 ‘배수진背水陣’이라는 병법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죽을 곳에 빠진 뒤에야 살게 할 수 있고, 망할 곳에 있어야 생존하게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물을 등지고 싸우는 것은 최악의 전술이었다. 그런데 한신은 그렇게 ‘달아날 곳이 없어야’ 병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그래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장수들이 모두 비웃은 이 전술로 한신은 적은 수의 병사로 많은 적을 승승장구 이길 수 있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한계이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의 많은 인물들은 자기의 한계와 직면하고 그것을 정면 돌파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존재의 변화에서 사마천은 고귀함을 발견한다.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나오는 인물 ‘섭정聶政’은 개백정이다. 개백정이라면 인간으로서는 가장 천한 신분에 속한다. 사람들이 다 자기를 무시한다. 그의 삶은 비참하다. 그런데 어느 날 엄중자嚴仲子라는 사람이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섭정을 찾아온다. 귀한 예물까지 들고. 한韓나라 재상 협루俠累에게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 섭정은 감동한다.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다니! 나에게 예우를 다하여 부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엄중자를 위해 협루를 죽이고 그에게 누累가 될까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냈으며, 자신의 배를 갈라 창자를 긁어내고” 죽는다. 엽기적인, 너무나 엽기적인! 그러나 『사기열전史記列傳』을 읽으면 뜻을 얻은 일에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 섭정이 너무나 존엄하게 느껴진다.

섭정은 죽었으되 살아 있다. 살아 있으되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남의 뜻에 따라 마지 못해 사는 삶은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삶이다. 그렇지 않고 ‘뜻을 얻은’ 삶-자신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은 죽음을 불사한다. 스스로 죽음에 처하는 삶-사마천은 이러한 삶에서 고귀함을 발견한다.
 

고귀해진다는 것
 
나는 요즘 장애인 활동 보조 일을 하고 있다. 전에 아침 활보를 했던 S한테 ‘활보짓’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내가 그날 신문에서 본 기사 얘기를 했다. 카드 빚에 몰린 어떤 남자가 일가족을 데리고 자살을 했다는 기사였다. 이 얘기를 듣고 S가 발을 마구 버둥거리면서(발을 손 대신 쓰는 S는 흥분하면 손을 휘젓듯 발을 버둥거린다)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죽으면 지나 죽지, 애들까지 왜 죽여! 살기 힘들면 활보짓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죽긴 왜 죽어!” 힘들어도 용기를 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뜻의 말이겠으나… 활보‘짓’이 뭔가. 그것도 지금 자기한테 밥을 떠먹여 주는 활보 앞에서.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S의 이 말에서 나는 장애인들이 그동안 세상에서 얼마나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왔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활보는 천한 일인가.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나 아직도 사람들은 일에 위계를 두는 것 같다. 우리 엄마만 해도 내가 활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아니 너는 공부를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겨우 남의 집 식모살이 하냐”고 탄식하셨다. 활보 일을 왜 천하다고 생각할까. 장애인은 천한 사람이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활보는 더 천하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인식이 있는 것 같다. 활보 일은 천하지 않다. 그렇다고 다른 일에 비해 특별히 고귀하지도 않다. 활보 일의 귀천貴賤은 다른 일과 비교해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태도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 일의 귀천은 달라진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할 때 백정 일도 고귀해질 수 있고, 왕 노릇도 누가 시켜서 억지로 대충 남의 일하듯 하면 허접해진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은 비천한 인물들이 고귀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고귀해지기 위해 산다. 고귀해졌을 때 마침내 “나의 삶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야 고귀해지나. 사마천에게 고귀함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나를 밀고 가는 것. 그 한계를 돌파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내가 이전의 나와는 달라지는 것. 내가 스스로 존재의 강밀도를 최대치까지 높여서 존재의 질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생각이 바뀌고 몸이 바뀌는 것. 이런 ‘신체 변용 능력’이 사마천이 말하는 고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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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왕후장상도 있지만 천민들도 많다. 시정 건달, 기인, 어릿광대, 자객, 장사꾼, 무덤 도굴꾼…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보통 고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기열전史記列傳』을 읽어보면 이들의 삶도 모두 고귀하다. 이 책에 나오는 자객은 “더 이상의 자객은 없다” 할 정도로 세상 최고의 자객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타인과 비교 불가능한 지점까지 자신을 밀고 나간다. 그래서 가장 자기다운 삶을 산다. 이들의 고귀함은 세상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에서 비롯된다.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냈으며, 자신의 배를 갈라 창자를 긁어내고” 죽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 섭정의 삶을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을까.

이 책에는 왕도 다 똑같은 왕이 아니다. 각자 처한 독특한 상황이 있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왕의 개성도 다 다르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진秦 제국이 멸망한 후 혼란스러운 중국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싸우면서 주도권을 다투었다. 같이 천하 통일을 꿈꾼 사람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 한신韓信은 이 둘 중 결국 유방을 선택하면서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항왕의 사람됨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항왕이 성내어 큰 소리로 꾸짖으면 천 사람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서 병권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기[匹夫之勇]일 따름입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경스럽고 자애로우며 말씨도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 공을 이루어 마땅히 봉작해야 할 때에 이르러서는, 그 인장이 닳아 망가질 때까지 차마 내주지를 못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仁일 뿐입니다.”(「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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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하늘을 덮는다[力拔山氣蓋世]’는 항우는 정말 힘이 셌지만, 소규모의 동네 싸움이 아니라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에서는 혼자 힘만 가지고 안 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싸울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진정한 장수의 능력이다. 그런데 항우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그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는 ‘리더쉽’이 부족했다. 천자의 능력은 자기가 뭘 잘 하고 힘이 세고 그런 게 아니다. 혼자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이것이 진정한 리더쉽이다. 항우에게는 그게 부족했다. 유방은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었고 인격이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천자가 되었는가. 유방에게는 사람을 보는 안목과 믿고 맡기는 대범함이 있었던 것. 사마천은 두 사람의 이런 차이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그릇이 작은 항우의 용기를 ‘필부의 용기[匹夫之勇]’라 부른다.

즉, 사마천에게 고귀함은 신분 질서의 위계가 아니다. 백정이 재상으로 신분 상승하는 게 아니다. 백정 재상의 위계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지점-자신만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 독자성은 어떤 것이 귀하고 어떤 것이 천하다고 하는 우리의 통념을 깬다. 그래서 과연 어떤 것이 귀하고 어떤 것이 천한가에 대해 다시 질문을 하게 한다.

인상여가 진나라에 가서 한 일도 바로 그것이다. 진나라의 왕과 대신들이 갖고 있던 지배 질서에 대한 표상을 완전히 깨버린 것. 그들을 ‘멘붕’ 상태에 빠뜨린 것. 인상여가 그때 그들 앞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얼라’에 불과한 조나라 사신이, 그것도 일개 무명 사신이 천하무적의 진나라 궁에 와서 그렇게 천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령을 하리라고는 그들 중 아무도 상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인상여는 호랑이 앞에서 호랑이보다 더 큰 호령을 함으로써 호랑이 혼을 쑥 빼놓았다. 인상여의 고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부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할 말을 다 하는 것. 외부의 상황에 내가 멘붕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죽기밖에 더하겠냐”며 상황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그래서 오히려 외부 상황을 멘붕 상태에 빠뜨리는 것. 사마천에게 고귀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표상 체계 안에서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비천한가 하는 표상 체계 자체를 깨뜨리는 것. 인상여가 ‘머리털이 우뚝 치솟아 머리에 쓴 관이 들먹거릴’ 정도의 기세로 호령을 할 때, 진나라의 왕과 대신들은 여기가 과연 조나라인가? 진나라인가? 저 자가 왕인가? 사신인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멘붕 권하는 책
 
『사기열전史記列傳』에는 이런 ‘깨는’ 인물들이 종종 나온다. 「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에서 한신韓信의 가난한 시절 이야기. 한신은 관리가 되지도 못 하고 장사로 생계를 꾸릴 재간도 없어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친구 부부가 새벽에 한신이 오기 전에 몰래 이불 밑에서 자기들끼리 밥을 먹고는 한신에게 밥이 없다고 한다. 나가란 소리다. 친구 집에서 쫓겨난 한신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강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때 강에서 빨래하는 어떤 여인이 한신의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듣고는 불쌍해서 밥을 주었다. 한신이 너무 고마워서 “내 나중에 반드시 이 은혜를 갚으리다”라고 하니 이 여인이 벌컥 성을 내며 이렇게 소리친다. “대장부가 스스로 밥을 먹지 못 하여 내가 불쌍히 여겨 밥을 주었으니 어찌 보답을 바라리오!”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도리인데 보답은 무슨… 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화를 낼 것까지야… 여인의 반응은 좀 ‘깬다’. 여기서 사마천은 ‘나’와 ‘너’의 교만을 깬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물이 막힌 곳에 물을 대주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런데 내가 물대줬다고 해서 보상을 바라거나 내게 물 대준 사람에게 꼭 보상을 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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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오기 열전孫子吳起列傳」에 나오는 병사의 어머니도 깨는 인물. 오기는 병사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는 장수로서, 병사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상처를 입은 병사의 종기 고름을 빨아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장군이라고 칭송하는데, 정작 종기가 난 병사의 어머니는 어이구 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전에 장군이 저 아이 아버지의 고름을 빨아주어 그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더니, 이제 내 아들도 죽게 생겼구나! 하면서 병사의 어머니는 통곡을 했다. 하하! 장수가 병사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장수의 욕심일 수 있다는 것. 이 일화도 훌륭한 장수에 대한 우리들의 통념을 깨뜨린다.
 
「굴원 가생 열전屈原賈生列傳」에 나오는 어부도 ‘깨는’ 인물이다. 굴원이 “세상이 온통 흐린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나는 멱라강에 몸을 던져 나의 고결한 뜻을 지키려고 한다”라고 하자, 어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혼탁하면 왜 그 탁류와 함께 흘러가지 않는가? 사람들이 모두 취했다면 왜 그들의 술 찌꺼기라도 얻어먹고 함께 취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서 어부는 “창랑의 물이 맑을 때에는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릴 때에는 밥을 씻는다”라는 가사의 창랑가滄浪歌를 부르며 표표히 사라진다. ‘쎈’ 말은 다 엑스트라들이 한다니까… 여튼, 어부의 말 뜻은 “때에 따라 처신을 달리 해야지 세상을 탓하며 자신의 고결함만을 주장하는 니가 더 더럽다”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갑자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니 그렇다면 고결함은 무엇이고 혼탁함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이 마구 흔들리면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 있는 순간이란 온전히 삶(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세계)에 속할 때도, 죽음(내가 모르는 세계) 편으로 훌쩍 넘어가 버릴 때도 아니다. 우리가 온전히 살아 있는 순간이란 삶과 죽음의 경계-자신의 한계와 오롯이 직면하는 순간의 생생한 체험, 나의 경계를 넘어 더 큰 생명의 흐름과 접속하는 순간의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마음의 역동성이다. 사마천은 이 도도한 흐름을 ‘역사’라고 보았으며, 이 생생불식하는 마음의 역동성을 『사기열전史記列傳』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르고, 무엇이 좋고 나쁜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기보다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많은 선악시비의 분별들에서 벗어나 그것들이 만들어진 상황을 새로운 하나의 질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중에 한 가지-고귀함이란 무엇인가? 금과 은과 주석 중에서 금이 가장 귀한 것이 아니라 금이 100% 금이 될 때 금은 고귀해진다. 은이 100% 은이 될 때 은은 고귀해진다. 나를 다른 대상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의 삶을 살 때, 온 힘을 다해 자신의 한계를 밀고나갈 때, 그래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져서 매순간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이때 비로소 나는 삶에 위계와 서열을 정하는 세상의 지배적 표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사마천에게 고귀함은 그런 것이며 『사기열전史記列傳』의 많은 ‘깨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그런 고귀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표상들을 깨뜨리는, 그래서 우리들을 항시적인 멘붕 상태에 빠뜨리는, 그야말로 우리를 ‘죽음에 처하게 하는[處死者]’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우리의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지?” (카프카)
 
 
 
댓글목록

나무꾼님의 댓글

나무꾼 작성일

정경미 선생님의 글을 읽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회원가입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EBS "고전읽기"에서 듣고 김영수 선생님의 사기열전을 읽었지만
선생님 처럼 간결하게 사마천의 삶의 고귀함과 나의 삶의 고귀함을 다시한번 생각할수 있게 해주셨어 감사합니다.
"100% 금일때와 100%의 은이 될때 고귀해 진다"는 좋은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오공님의 댓글

오공 작성일

2013년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 '정말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네요. 둘러쓴 인두겁만 가꾸고 치장하는데 너나 할 것없이 매달리는 시대, 사마천이 말하는 '고귀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네요. 언제나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난 이래, 저래 할 줄 만 알았던 저를 참 크게 깨닫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정쌤처럼 쓸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몇 시간 남지 않은 오늘부터라도 인간으로써의 '고귀함'을 밝히도록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잘 읽었고요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오년에도 계속해서 좋은 글 부탁 드리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봄바람님의 댓글

봄바람 작성일

사기열전- 어려운 머나먼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고보니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공이산님의 댓글

우공이산 작성일

글을 쓰신 분은 댓글을 읽지 않는 것인지..

길든, 짧든 댓글에 대한 답글 또한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정남자식님의 댓글

정남자식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감동이네요 공감100%!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올려 주세요^^

후안님의 댓글

후안 작성일

이글을 읽고 댓글을 달고자 하는 마음에 회원가입도 했습니다. 그냥 감동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2번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 쓰신 글도 많이 보았습니다만 이처럼 사기열전의 진수를 깨뚫는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글을 읽고나니 전 사기를 읽은게 아니라 그냥 본듯 합니다.  감이당 대중지성의 연륜을 내다볼수 있는 글이고, 감이당의 공부의 깊이가 어느정도인지를 알수 있는 글입니다. 충격입니다. 이렇듯 열전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저도 똑같이 인상여열전을 읽어보았지만 이 글을 쓰신것처럼 생각하고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동안 나름 고전읽기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전 책을 주마간산식으로 보고마 지나갔지 읽은 것이 아니네요... 어떻하든 기회를 만들어 대중지성의 그 과정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저의 독서력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해주는 너무나도 좋은 글입니다. 지금 당장 이런 글을 모아 출간을 하셔도 괜찮으실듯...그동안 나름 글을 조금씩 쓴다고 했는데...이글을 보니 그동안 제가 쓴 글은 그저 허접한 쓰레기였던듯 하네여...모든 글을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