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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다양성을 통해 발견한 새로운 길
 글쓴이 : 놀배 | 작성일 : 13-08-28 00:41
조회 : 4,880  
 
 문화의 다양성을 통해 발견한 새로운 길 
                                                               
 안순희(감이당대중지성 3학년)
 
내 노력을 펼칠 수 있는 나의 세계, 나의 출구, 나의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 아이를 가짐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는 생각처럼 남자와 여자를 기만하는 인생의 오독誤讀도 없을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마거릿 미드,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08. 43-44p
 
뭔가 자기 삶을 새롭게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베네딕트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베네딕트는 결혼 후 아이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남편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갔다. 그 즈음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인류학을 만난다. 이는 곧 베네딕트에게 삶의 전환점이 된다. 즉 인류학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1948년 5월, 그녀는 유럽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한다. 하지만 체력이 심하게 소모되어 귀국한 지 이틀 만에 심장혈전증으로 쓰러졌고, 닷새 뒤엔 결국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명저『문화의 패턴』,『국화와 칼』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고전이 되었다. 베네딕트는 자신의 삶에서 직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돌파해 나갔을까?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글쓰기, 소녀시절의 유일한 위안
 
베네딕트(1887-1948)는 미국 뉴욕주 북부에서 태어났다. 두 살 무렵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외할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독립적인 성격의 어머니는 교사,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두 딸을 힘겹게 키웠다. 아버지 관 옆에 서 있는 어린 베네딕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라”며 신경질적으로 채근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은 베네딕트는 이후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방황.jpg

게다가 어릴 때 앓은 열병 때문에 베네딕트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그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러도 대답을 잘 하지 않는 베네딕트를 ‘뚱한 아이’로 오해했다. 반면 여동생 마저리는 성격이 밝고 활달해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베네딕트는 성경을 철석같이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 환경에서 자랐다. 소녀시절 그녀는  혼자 방황하며 우울증에 시달렸으나 내색하지 않았고 글쓰기로 대신 표현할 뿐이었다. 다음은 그 시절 베네딕트가 쓴 일기내용이다.
 
인생의 문제점은 해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부처의 해답, 토마스 아켐피스와 엘버트 허바드의 해답, 브라우닝, 키츠, 스피노자의 해답, 소로, 월트 휘트먼, 칸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해답 등 아주 다양하다, 그들의 해답은 돌아가면서 나의 필요에 부응한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 나는 나이고 그들 중 어떤 사람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의 완벽한 해답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같은 책, 23p)
 
나는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살아서 그들의 영혼을 구제했는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 
                                                                                                                  (같은 책, 24p )
 
당시 베네딕트의 인생에 대한 고민은 어떤 것이었을까? 추측컨대, 한쪽 청각 상실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즉각적인 교감이 어려웠을 때 ‘뚱한 애’ 취급이나 할 뿐, 자신의 고충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으니 속으로는 많이 우울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그녀의 내면에서 신이 있기나 한 것인지, 신이 있다면 왜 나의 고통을 외면하는지, 그리고 영혼 구제는 어떻게 가능한지 등의 의문이 꼬리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신이 해결해준다는 믿음을 절대시하는 가족들에겐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을 그녀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베네딕트는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며 그리스도 외에 부처도, 다른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도 진리가 될 수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것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등을 일기에 쓰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은 것 같다. 이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이후 베네딕트가 인류학을 연구하는 데 큰 자산이 된다. 현지조사든 도서관 조사든 자기가 관찰하고 분석한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은 인류학을 공부하는데 매우 중요한 필수 과정이었으니까.
 
적극적인 삶과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베네딕트3.jpg

1905년, 베네딕트는 1880년대에 남녀평등 교육실시를 목적으로 설립된 배서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베네딕트는 문학과  시를 공부하고, 잡지 등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니체의 작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니체가 주장하는 창조성을 억압하는 인습적 도덕 타파, 순종에 대한 저항 등에 공감하고 그녀를 구속하는 전통적인 여성관으로부터의 탈주나 미래를 열어갈 목적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베네딕트는 여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나 우울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채 하는 교사생활 그리고 남자의 사랑에 의존하는 당시 보편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이 그녀에게 아무런 활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직을 떠나 외할아버지 농장에 내려가지만 그곳 생활도 그녀에게 일시적인 편안함을 주었을 뿐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본질적인 것은 자신의 이상을 향한 열정적인 생활방식이었다. 여자로서 자신이 직접 세상과 마주하고 부딪히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적극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것. 이러한 그녀의 바람이 다음에 잘 나타나 있다.
 
여성의 노동이 가치를 지니려면 뭔가 구체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무엇이 문제인가? 인생의 어떤 커다란 것을 추구하려는 적극성이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로부터 면제되는 자유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획득하려는 적극성. 어떤 여성에게 그 커다란 것은 정치 활동인데, 그들이 정계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에게 인생의 커다란 것은 사랑, 자녀, 능력에 맞는 사회활동이다. 그런데 양심적으로 말해보자면 사랑과 자녀의 문제에는 적극성이 없다. 하지만 우리 여성은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이 실현되는 조건에 대해 일정한 발언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여성도 그런 문제들을 성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같은 책, 50p)
 
그런데 생화학자 스탠리 베네딕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 후엔 여성의 권리획득에 대한 전망을 시기상조라 생각하며 자신의 열망을 일단 유보한다. 그리고 스위트 홈을 꿈꾸는 보편적 여성의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스탠리와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아이 낳는 문제로 남편과의 갈등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스탠리는 그 수술에 반대했던 것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1920년대 초반부터 베네딕트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다가 스승 보아스의 조교로 있던 시절, 대학 4학년인 마거릿 미드(1901-1978)를 만나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미드의 룸메이트가 자살했을 때 베네딕트가 위로해준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25년 미드가 사모아 섬으로 현지 탐사를 떠나 떨어져 지낼 때 베네딕트는 많이 힘들어하며 다른 여성을 사귀기도 했다. 그 후 52세가 되는 1939년, 임상심리학자인 루스 밸런타인을 만나 사망할 때까지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 다시 말해 베네딕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신한 뒤부터는 더 이상 남자를 사귀지 않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당시 미국사회는 동성연애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베네딕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충실했던 것이다.
 
‘인류학’과 ‘스승’을 만나다
 
1919년, 베네딕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녀는 사회 연구를 위한 뉴스쿨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인류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베네딕트는 인류학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된다. 당시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롭고 충만한 기쁨이 인류학을 공부하는 생활 속에 있었다. 그녀는 이 새로운 삶의 길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붓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자신이 미국사회에서 왜 소외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면서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34세가 된 1921년,  베네딕트는 프란츠 보아스(1858-1942)가 학과장인 컬럼비아 대학원에 입학하여 논문「북아메리카의 수호신 개념」으로 세 학기 만에 학위를 취득하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현지조사가 아닌 도서관 자료조사를 토대로 했지만, 문화적 요소의 다양성을 매우 꼼꼼하게 분석한 논문으로 나중에 미국인류학회에 의해 출판되었다.
 
1922년 여름, 남부 캘리포니아 세라노 족을 현지 탐사한 것을 제외하고 베네딕트의 초기 저작은 모두 도서관 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 현지 탐사 결과 세라노 족의 문화는 재구성할 수 없을 정도로 파편화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이런 조각들을 모아 이리저리 짜 맞추며 결락된 부분들을 메우는 일 등을 즐겨했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거나 퍼즐게임을 하듯 모아진 불완전한 자료들을 가지고 문화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에 푹 빠지곤 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따분하고 힘들다고 꺼리는 일을 베네딕트는 즐겁게 해냈다. 보아스는 그녀의 이러한 성실한 태도에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연구 작업을 그녀와 함께 했다.
 
베네딕트는 1924년 주니 족을 시작으로 코치티 족, 피마 족 탐사를 한다. 이어 학생들의 메스칼레로 아파치 족 현지탐사를 감독하고 지도한다. 그녀는 보아스의 현지탐사 방법을 중시하여 현지 제보자의 증언을 꼼꼼히 기록했다.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그녀로선 현지부족의 언어를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건이 될 때마다 현지탐사를 했다. 점점 사라져가는 여러 부족의 신화나 의식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함께한 학생들에게는 산발적으로 관찰한 사항들을 토대로 하여 탐사 내용 전체를 구성해내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인류학1.jpg스승 보아스.jpg

 
베네딕트의 학위논문을 지도한 보아스는 독일의 진보적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인류학의 방향을 잡은 중심인물로 인류학을 대학 안의 학문으로 정착시켰다. 그리고 학회, 잡지 등을 만들고, 대중과 정책입안자와 다른 과학자들로부터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망도 구축했다. 보아스는 모든 사회가 똑같은 발달 단계를 거친다는 19세기의 단선적 진화론을 비판하며 각 문화는 그 문화의 독특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각 문화의 흔적이나 주제를 꼼꼼하게 상호비교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보아스는 물리학, 수학, 지리학 등을 두루 섭렵하여 지적 정확성과 엄밀함이 몸에 밴 학자였던 만큼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과학적인 연구방법을 중요시했다. 
 
1930년대 중후반에 베네딕트는 스승 보아스와 반파시즘 투쟁에 함께했다. 보아스 사후에는 웰트피시와 함께 소책자「인류의 인종들」(1943)을 발간한다. 인종에 관한 과학적 정보를 담아 미국 내 흑백 인종문제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내용이다. 나치에 의한 만행이 점점 알려지자 흑인과 유대인이 사회적 편견과 억압의 희생자라는 인식이 미국 내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베네딕트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살았던 바, 그러한 편견과 억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자를 한 보수적 의원이 ‘공산당 선전물’이라고 비방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예상보다 더 많은 부수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실체는 없다
 
1934년에 출간한『문화의 패턴』은 그녀가 연구해온 인류학적 내용이 집약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문화적 차이가 두드러진 세 부족 즉 주니 족, 콰키우틀 족, 도부 족의 문화를 민족학적 관점에서 아주 꼼꼼하게 비교하고 기록함으로써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다양한 문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 세 부족은 베네딕트가 신뢰하는 인류학자들에 의해 현지탐사 되었고 민족지적 자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선정된 것이다. 뉴기니 섬의 도부족은 레오 포천(마거릿 미드의 남편)이, 북아메리카 북서해안 인디언 콰키우틀 족은 스승 보아스가, 푸에블로 인디언 주니 족은 베네딕트 자신이 조사했던 것이다. 책 제목을 정할 때도 베네딕트는 자신이 인류학자로서의 전문성이 분명히 드러나길 바랄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의 연구에 대한 자긍심이 컸다는 의미일 것이다.
 
 베네딕트는『문화의 패턴』에서 니체 작품 속의 존재에 대한 상반된 두 개념 즉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로적’이라는 개념어를 차용한다. 1927년 피마 족 현지탐사에서 발견한 푸에블로 문화와 평원 문화 사이의 대조적인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존재의 일상적 범위와 한계를 파괴함으로써 어떤 정신적인 극단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 이를테면 만취 상태, 광란 상태에서의 계시 같은 것을 추구한다. 반대로 아폴로적 인간은 중도를 지키거나 상식적 규범 안에서 차분한 일상을 중요시할 뿐 정신적 환각 세계 같은 것은 기피하거나 혐오한다.
 
푸에블로인디언.jpg

 
이러한 관점에서 베네딕트는 종교적 의례행사를 중시하고 냉정함을 중요 덕목으로 삼는 주니 족을 아폴로적 인간, 종교의식의 절정에서 주인공 춤꾼이 제 정신을 잃을 정도의 황홀경을 추구하는 콰키우틀 족을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으로 본다. 또 베네딕트는 정신의학 용어인 ‘편집증’과 ‘과대망상증’을 써서 도부족과 콰키우틀 족의 문화적 특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늘 타인을 의심하고 죽을 때까지 살인적 투쟁의 삶을 사는 도부족을 편집증, 재산을 과시하며 승리는 당당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 수치는 견디지 못하는 콰키우틀 족을 과대망상증으로 본 것이다.
 
세 부족의 문화적 차이를 통해서 베네딕트는 질문한다. 우리가 흔히 차별하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무엇인가? 성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 한쪽 귀의 청력 상실 등 베네딕트 자신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칭송받는 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은 악의와 배신을 미덕으로 삼는 도부족 사회에선 일탈자가 된다. 또 감정의 극단을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적 부족에서 인정받는 자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아폴로적 부족에선 무시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정상이란 개인의 인성을 특정사회에서 수용하느냐 아니면 배척하느냐에 따른 가치 갈등일 뿐, 비정상이라고 할 만한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베네딕트는 문화와 비정상을 관련시켜 논의함으로써 일탈이나 문화적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인식의 지평을 넓힌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다음 글에 그녀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 가치가 반드시 절대주의 철학과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문화적 상대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 안에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옹호하는 제도를 혼란 속으로 빠뜨릴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의견(문화적 상대성)을 관습적 신념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것은 선량한 생활의 또 다른 믿음직한 방패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더 현실적인 사회적 신념에 도달하고, 인류가 생존의 원자재에서 자신을 위해 만들어냈던, 공존하면서도 유효한 삶의 패턴을 희망의 토대와 관용의 기초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문화의 패턴』, 루스 베네딕트,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08, 395-6p
 
베네딕트는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어릴 때부터 주어진 기독교 신앙을 버린다. 모든 것을 유일신이 주관한다는 믿음은 인생의 해답을 찾는 길이 여럿일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문화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인류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납득하기 어려웠던 기존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을 발견한다. 특히 동양의 선종禪宗 즉 명상이나 화두선話頭禪 등 자기훈련을 통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베네딕트가 말년에 출판한『국화와 칼』(1946)에는 자신이 매료되었던 선종에 대해 심도 깊게 연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소녀시절부터 혼자 간직했던 자기 구원에 대한 의문도 해소되었다. 신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수양을 통해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명상.jpg

서구와는 다른 문화(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줄곧 그녀가 느껴왔던 소외감에서 벗어나는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과 결별하고 자신을 억압하던 기존의 도덕관념이나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났다. 이후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인류학 연구에 매진한 베네딕트.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과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한 학자였기에 그녀가 전하는 다양한 세계의 이야기에 지금도 우리가 공감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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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명도   2013-09-04 22:48:33
 
* 서양의 유일신의 신앙적 작가가 그것을 버리고 동양적 사유와 명상을 통해 진리를 구현해 나가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미국의 스님, 현각이 집안의 전통 종교인 천주교와 서양 철학을 떠나 숭산의 禪불교에 매료된 것과 비슷하며 역시 외국인 청안스님이 주역의 선승 탄허스님의 유훈으로 지은 대전 자광사에서 선을 가르친다는 점이 퍽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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