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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죽음에게 길을 묻다 (감성 3학년 밴드_박장금, 안순희, 임경아)
 글쓴이 : 장금 | 작성일 : 13-11-16 07:27
조회 : 7,302  
삶, 죽음에게 길을 묻다

'죽음'조(박장금, 안순희, 임경아)


<천상의 길 차마고도>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오고 갔던 문명의 교역로 차마고도를 다루고 있었다. 차마고도에 나오는 티벳인들의 환경은 척박해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는 그들의 소원이 우리를 황당하게 만든다. 돈을 모으는 목적이 잘 먹고 편안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란다. 그들의 소원은 오체투지로 수도까지 가는 거라고 했다. 그들은 왜 그냥 걸어가기도 힘든 길을 오체투지로 가는 것일까? 그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한다. ‘세상 모든 존재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간다고. 도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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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평화를 기도하면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승자가 모든 걸 갖게 된다.’한참 유행했던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의 명대사이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기업의 리더들이고, 게임의 목적은 회장 자리 탈환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전력질주 하지만 얼굴은 하나같이 음울하기 짝이 없다.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서로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 하지만 모두가 속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지옥이지만 경쟁에서 승리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마침내 게임은 끝났다. 아버지가 이룬 재벌가를 지키기 위해 여주인공(이요원분)은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오너가 되었다.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황금은 손에 쥐었지만, 그녀는 아무도 없는 식탁에서 오열하며 혼자 밥을 먹는다. 작가는 황금의 속성을 그리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재물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아무리 왕따가 된다고 해도 원 없이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싶은 욕망은 강력하고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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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에 반해 티베트 사람들 즉, 아무것도 없으면서 오체투지로 모든 존재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은 뭔가 숭고해 보이지만 우리 눈에는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마음의 평화는 얻고 싶지만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자본의 코드, 상품의 코드에 익숙한 우리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대안이 없다면 결국 황금을 갖든 못 갖든 그 길을 똑같이 밟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황금을 거머쥔 채로 아니면 결핍된 채로! 그렇다면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차마고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프레임에서 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와 다른 삶들을 탐사해보려고 한다.  


생사를 사유한 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삶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죽음을 사유하는가, 사유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황금을 향한 질주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찰이 없다. 반면에 오체투지를 일상으로 하는 티베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항상 생각한다. 즉 존재에 대한 관계성을 늘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황금의 제국에서는 오직 경쟁과 황금에 대한 집착 외에 다른 관계는 고려되지 않는다. 더 많이 가진 자가 지배하는 세상은 소유와 집착이 난무하는 곳이다. 즉, 다다익선의 세상. 그 게임은 끝이 없다. 계속 게임하는 자들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황금은 점점 커지지만 주인은 계속 바뀐다. 그야말로 황금이 주체가 되는 게임에서 인간은 소모될 뿐이다. 불멸을 향한 게임.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웬만해서는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다. 자기만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불멸의 욕망을 황금에 투사하기 때문에 황금의 노예 되기를 자처하게 된다. 이것은 유형의 세계만을 인정하고 무형의 세계를 무시하는 자가 빠지는 함정이다. 다행히 인간은 현생인류로 변화하면서 유형 세계의 고리를 끊고, 무형을 사유하게 되었다.  


뉴런의 결합 방식이 훨씬 복잡해져, 네안데르탈인의 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횡단적’인 결합조직이 현생인류의 뇌에 형성되었던 겁니다. 용량이 큰 네안데르탈인의 뇌에서는 기술적 지식, 사회적 지식, 박물학적 지식 등을 취급하는 영역이 제각기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커다란 방에 덩치 큰 컴퓨터가 병렬도 배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각 컴퓨터는 가장 자신 있는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상태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현생인류가 갖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뇌에서는 다른 영역의 지식을 횡적으로 서로 연결해가는 새로운 통로가 형성되었으며, 그 통로를 전에는 본 적도 없는‘유동적 지성’이 엄청난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 『신의 발명』,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2005, 64쪽

나카자와 신이치의 설명에 따르면, 약 3만여 년 전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대뇌에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박물학적 지식이 유형 세계를 인식했다면 유동적 지성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유하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이 물질 뿐 아니라‘초월(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됐다는 것. 이런 사유는 죽음을 고민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죽으면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연결성. 우리도 익히 들은 신화나 정령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예컨대 조상신, 도깨비, 귀신 등 다양한 초자연적 존재들. 그것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에너지의 흐름으로 존재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다. 연필로 중심선을 따라 선을 그리면 표면 위에 있던 연필이 어느새 이면으로 나와 버린다. 이렇듯 안과 밖의 구별 없는 세계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로 연결된다. 


삶과 죽음의 근원에 삶도 죽음도 아닌 에너지의 연속체가 있으며, 거기에는 수많은 스피리트가 살고 있어, 지나가는 여성의 태내로 뛰어들어서는 새로운 생명이 되어 현실 세계에 나타납니다. 그 세계에서 잠시 체험을 쌓은 후에 죽음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통과해서, 또다시 생사를 초월한 연속체로 돌아간다는 식이지요.  

─ 같은 책, 107쪽

뫼비우스의 띠적인 사유를 잘 반영한 예로 환상취락을 들 수 있다. 망자의 세계를 중심에 둔 채 산 자의 가옥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배치하여 망자의 세계를 감싸 안는다. 이런 구조는 일본의 조몬 중기(BC3,500년경)나 아마존 강 유역 등 상당히 방대한 지역에서 확인된다. 이런 조건은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사유를 몸에 배게 만든다. 이런 사유는 일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금기가 기억날 것이다. 문지방은 방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다. 예컨대 경계선을 밟는 것은 경계를 무너뜨려 악귀를 방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역을 인정하고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경계선을 통해 이승과 저승, 인간과 귀신 세계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정령같은 존재를 자연스럽게 사유한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처럼! 그렇게 선조들은 일상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사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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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간이 동물을 사냥했을 때 사냥꾼에 의해 살해된 동물은 이 세상에 올 때(生) 가져온 털가죽과 고기를 인간에게 선물하고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歸)고 보았다. 즉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지 삶과 단절된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도 사람이 죽었을 때‘돌아간다’는 표현은 생사를 동시에 사유한 흔적이다. 즉,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니라 변화를 의미할 뿐이다. 여기 재미난 변화에 대한 사유가 있다. 북방불교에서는 시신을 처리하는 네 가지 방법(수장, 화장, 풍장, 매장)을 사용한다. 다양하게 시신을 처리하는 이유는 인간의 몸이 물(水), 불(火), 공기(風), 흙(地)의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다르게 치우친 몸을 타고난다고 보았다. 그들의 목표는 가능하면 빨리 몸이 해체되어 본래의 원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토기가 많은 자는 매장을 원하고, 화기가 많은 자는 화장을 원한다. 또한 시신을 강물이나 호수 등에 던지는 경우도 수장을 통해 빨리 해체되기 위함이다. 
 
티베트인들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하는 것도 북방불교의 시신처리와 비슷하다. 공기 속의 거주자인 새의 먹이가 됨으로써 공기 원소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들은 새들이 사체를 먹기 좋게 잘라 놓는다. 죽은 사람의 살을 독수리가 쪼아 먹고 하늘로 날아가면 사자(死者)의 영혼도 함께 자유로워진다고 여겼다. 이때 라마승은 나팔을 불어 독수리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망자의 영혼이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독경하면서 배웅한다. 나를 떠나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우주가 하나임을 인정하는 의례인 것이다. 
  

기독교, 삶과 죽음의 단절

그렇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진작부터 유형과 무형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뫼비우스의 띠가 싹둑 잘려나간 것일까. 나카자와 신이치에 의하면 일신교(기독교)의 출현과 함께 생겨났다고 한다. 


일신교의 신이라고 해봤자 고작해야 3천 몇 백 년의 역사에 불과하며, 그런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죠. 그러니 이제 인류는 일신교의 신 이전에 자신들이 무슨 생각을 했던가를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합니다.

─ 『불교가 좋다』, 가와이 하야오.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2007, 160쪽

모든 정령을 흡수 통합한 기독교의 등장으로 유형과 무형을 연결하는 통로가 단절되었다. 기독교는 이교도의 모든 신화를 융합한 종교다. 이집트의 신 호루스, 페르시아 신 미트라, 그리스의 신 알티스, 인도의 신 크리슈나 등등의 신의 공통점은 12월 25일 출생, 죽은 지 3일 후 부활, 십자가에 못 박힘, 열두 제자 등이다. 이렇게 다른 지역의 신화가 비슷한 이유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별자리를 의인화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구와 태양이 가장 멀어진 날이 12월 22일이다. 이때 태양이 꼭 멈춘 것처럼 보이는데‘십자 별자리’근처에 멈춘다. 이후 25일이 되면 밤보다 낮이 길어지면서 태양이 1도 정도 북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태양이 사흘 동안 멈춘 것을 죽음으로 보고,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부활로 본다. 그 때 태양은 십자 별자리에 정확하게 안착하는데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모든 신화 모티브는 태양을 관찰한 것 즉, 자연의 변화를 의인화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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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에게 태양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따듯함과 밝음, 곡식을 자라게 해주는 힘이 모두 태양에서 나온다. 예수의 뾰족한 가시 면류관 또한 태양의 빛을 상징한 것이다. 하늘에서 태양이 그 항로 상 최고점에 도달하는 시기에 불의 축제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연의 리듬을 함께 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불의 축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양 숭배 이면에는 어둠의 세상이 동시에 공존한다. 즉, 태양이 밤을 통해 부활하는 것처럼 죽음을 통해야 생명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카니발은 태양축제 이면의 자연의 리듬을 표현한 의식이다. 12월 중순에는 카니발이 시작되는데 요란한 잔치와 굉장한 소동, 광적인 환란 추구가 있었다. 밤은 어둡고 분별이 없는 시간이다. 이렇듯 카니발 축제 기간엔 자유인과 노예의 차별이 일시적으로 폐지되며 아무런 위계 없이 마시고 놀았다. 겨울의 리듬인 죽음과 혼란을 카니발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불의 축제, 카니발 등을 통해 그들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리듬을 몸에 각인시켰다.
 
자연의 리듬을 타는 자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변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뫼비우스 띠의 가운데를 절단해 버림으로써 생과 사의 연결을 끊었다. 사를 버리고 생을 삶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불안한 자들이여 모두오라. 교회는 유일신을 믿으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꼬시기 시작한다. 이것이‘제도로서의 은총’이다. 은총(신의 구원)이 제도화되었음은 생사의 연결을 제도가 대신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죽음은 개인 통찰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 교회를 가야 얻게 되는 소유(천국행 보장 티켓)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교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또한 인간은 종교뿐 아니라 제도, 돈, 권력 등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구원은 오직 교회에서만 가능하고, 돈을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고, 배움은 학교에서만 일어난다는 전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보다시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늘 두려울 수 밖에. 우리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립적으로 생과 사를 통찰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죽음를 사유하는 사람들

지금도 인도 사람들은 생사를 연결하며 살아가고 있다. 큰 도시인 바라나시에는 갠지스 강이 흐른다.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을 ‘성스러운 어머니 강’이라고 부르며 그 강물에 몸을 담그면 이전에 지은 죄가 씻겨 진다고 여겼다. 또한 망자를 갠지스 강물에 담그면 이승에서 지은 죄를 다 씻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갠지스 강은 세정작용과 함께 죄를 정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환생하게 하는 성수다. 빨래하는 광경과 화장하는 의식이 강 곳곳에서 일어나고, 상주는 울거나 곡을 하지 않고 먼 길을 떠나는 망자를 배웅한다. 
 
또한 티베트인은 삶이 종교고 종교가 곧 일상인 삶을 살아간다. 스님이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티베트인은 집이나 사원에서 오체투지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종교적인 삶에서도 사원 안과 밖의 경계가 거의 없다. 오체투지의 일상화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이마 중앙에 굳은살이 박인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체투지는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완전히 땅에 닿게 하는 절이다. 그들이 오체투지를 하는 목적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지금의 자신을 깨고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그들은 지금의 자신을 떠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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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자아를 떠나 인드라망에 접속하라!

이런 티벳인을 보면 태생적으로 매우 착하고 여유로운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의 환경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원(高原)의 한랭 건조한 기후로 인해 농작물의 종류는 매우 적다. 그들은 짬빠라는 주식을 먹는데 그것은 보릿가루를 수유차(야크 젖으로 만든 버터를 넣고 끓인 차)에 버무린 것이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식사지만 그들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나누며 살아간다. 그들은 불평하는 법이 없다. 불평이란 누군가와 비교할 때 일어나는 마음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결핍감을 토대로 유지된다고 한다. 그런데 티베트인은 ‘나’라는 개체는 없고 오직 연기의 그물망 안에서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를 내면화한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살아간다. 때문에 나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평화를 위하는 것이 지금 나를 위한 기도라는 사유가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생사 연결의 사유는 그냥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소유나 이기심과 여전히 싸우고 있다. 하지만 앉으나 서나 걷거나 마니차(法輪)를 돌리며 진언 옴마니반메훔(연꽃 속의 보석이여)을 암송하며 수행을 자처한다. 정화스님도 말씀하셨다. 분별을 멈추기 위해서는 호흡을 관찰하거나 일종의 주문을 외우면서 언어분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야 분별된 상태를 넘어서 개체가 전체가 되는 느낌을 알게 될거라고. 
 
이처럼 티베트인은 삶에서 끊임없이 분별지심을 넘는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는‘나’라는 개체에 대한 감각이 너무 예리해서인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주어진 조건이 너무나 불리해 보이고, 싫은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 마음장을 해체할 수 있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죽음을 사유하라

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더는 밤과 죽음을 기억하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하지만 여전히 태양은 뜨고 밤은 온다. 그리고 우리 삶에도 언젠가는 죽음이 올 것이다. 삶이 지속되는 한 죽음을 잊고 살 수 있지만, 미루어 놓은 죽음과 만나는 건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현대인이 문명의 세례를 폭발적으로 받으면서도 불안한 것은 죽음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죽음을 일상으로 불러들였다. 또한 타자와의 연결을 통해 공동체와 나를 분리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태양과 우주와 동물과 식물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지 다른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하여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넘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핍을 느끼지 않고 충만한 삶을 사는 티베트인처럼. 이런 자각은 한 번에 끝나지 않기에 그 자각을 지속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수행인 것이다. 이제 비로소 오체투지로 세상 모든 것의 평화를 기원하는 그들의 수행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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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는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수행

생사를 사유한 그들은 인간이 나무가 되고 곰이 되고 흙이 되고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삶에서 죽음을 사유하기 때문에 무형의 흐름을 감지한 것이다. 지금의 내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지금과 다른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그 자체로 충만해질 수 있다. 황금의 제국처럼 위너가 되어야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또 대단한 일을 해야 위대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있는 그대로 삶과 죽음을 연결할 수 있다면 어떤 것과도 공감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삶은 충만해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 알려준 삶의 새로운 비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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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삐돌이   2015-05-25 15:03:43
 
옴마니반메훔.
개체가 전체가 되는 느낌.

황금은 점점 커지지만 주인은 계속 바뀐다. 그야말로 황금이 주체가 되는 게임에서 인간은 소모될 뿐이다.
자본주의는 결핍감을 토대로 유지된다.

==============
감사합니다. 잘 듣고 갑니다.
명도   2013-12-01 10:41:3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청화스님의 분별이야기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분별이 곧 道라는 말도 있는데요, 분별을 없애려하면 더 다가오니 분별이 그대로 길이다,,,라고 보아도 되며 '있는 그대로의 삶' 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생사여일, 생사초월이 되어 여여한 삶을 살 수가 있지 싶습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예쁜 꽃을 피워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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