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장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편안하고 안락한 것에 대한 집착이 나를 가두고 있는 새장이라는 걸 알아챘을까? 외물에 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 대자유의 경지에 접속하지 못했다면, 지나친 배려와 보호, 안락함이 생명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걱정에 걱정을 낳는 번뇌 망상이 자유의 큰 도적이라는 것도 모르고 망집(妄執) 속에서 동동거리고 있을 게다. 자연과 우주는 그 자체가 변화인 것을, 그러한 것을! 나는 그 명료한 진리를 망각한 채 그동안 이를 밀어내려고 얼마나 용을 쓰며 문을 닫아걸었던가! “사람들이 이미 좋게 생각한 바를 비난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자』 안동임 277쪽) 는 말과 같이 나는 먹이 걱정 없고 추위나 사냥꾼의 위험이 없는 새장의 새처럼 편안한 삶의 조건들에 대해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복 많은 나의 삶이란 세상의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거세당한 삶, 손바닥만한 안락함과 대자유를 맞바꾼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속에서 면역력을 잃은 나의 생명에너지는 계속 신호를 보낸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조균(朝菌)은 밤과 새벽을 모른다.”(같은 책 30쪽)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 조균이라는 버섯과 울타리 안에서 세상의 마주침과 변화에 무지한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나와 무엇이 다른가?
북명에 사는 물고기 곤은 삼천리 파도치기를 해서 붕새가 되었다. 붕이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르자 쓰르라미가 비웃었다. 느릅나무에 오르다 내동댕이쳐질 인생, 터무니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작은 날짐승인 쓰르라미는 붕의 날개 아래 두텁게 쌓인 위대한 바람의 힘도, 끝없는 그 푸르른 창공의 대 자유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자, 이제 나는 선택해야 한다. 수풀 속에서 비웃음을 날리는 쓰르라미가 될 것인가, 장애 없는 절대 자유 경지를 향해 날갯짓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