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의 만남은 요행수를 기대해 점이나 보려는 나의 어리석음이 깨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기괴하고 장대한 상상이 펼쳐지는 글들이 이어졌다. 이미지는 그려지나 뜻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친구의 도움으로 <내편>을 겨우 읽고 장자와 헤어졌다.
60대, 장자를 다시 만났다.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나름 애를 썼는데 나만 모든 일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아들, 딸과는 갈수록 나만의 짝사랑이다. 내가 아파트를 팔면 놓친 풍선 꼴이 된다. 값은 아득히 올라가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남편은 고맙지만 맘에 안 든다. 생각의 전환은 시도하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졌다. 기억을 곱씹으며 ‘네 탓’도 했다. 이렇게 자신을 들볶는 와중에 감이당을 만났다. 여기선 삶을 해석하는 다양한 층위의 담론들이 열렸다. ‘남들처럼 살려고’했지만 그것이 안 돼 슬펐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중지성을 신청했다. 여기의 『장자』는 예전의 『장자』가 아니었다. 광고와 물욕에 사로잡혀 있던 내가 조금씩 보였다. 외부의 잣대에 휘둘리는 모습도. 자신 삶의 해석이 남들에게 있으니 얼마나 흔들리며 괴롭겠는가?
‘추수’편에는 장자의 당당한 삶이 잘 나타나있다. 초 왕이 두 대신을 보내 그를 초청했다. 낚시를 하고 있던 장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하며 단번에 청을 거절한다. ‘자신의 뜻은 감추고 왕의 안색을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기 싫다. 가난하지만 자유를 누리며 살겠다.’는 확고한 태도다. 눈이 환해졌다. ‘그래, 이거야!’ 장자의 호탕함이 조명탄을 터뜨린 듯, 휘청거리는 내 삶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돈, 남들 눈 등 외부를 의식하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장자는 많을수록, 높을수록 좋다는 소유의 획일적 가치를 한 방에 날린다. 당위와 표상이 아닌 너의 삶을 살아내라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