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장자스쿨] 가타리라는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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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맨발 작성일19-07-19 18:49 조회1,596회 댓글0건본문
가타리라는 번개
강지윤(감이당 장자스쿨)
68년도 봄. 프랑스에서는 기존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이 일어났다.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던 거대한 담론도, 노동당 같은 조직적인 정당도 아니었다. 그 해 이른 봄 낭테르 대학의 몇몇 학생들은 학내 문제 해결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제 살만한데 왜?”라며 기성세대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학생들은 소수자의 권리와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금방 가라앉을 것 같았던 이 시위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자 경찰은 곤봉을 들고 무차별적으로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물대포를 쏘았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프랑스 전역에 방송되면서 폭력적인 경찰을 향해 노동자들도 힘을 모았다. 그렇게 68혁명의 봄은 시작되었다.
봄기운처럼 뻗어갈 것 같았던 혁명은 구심점 없는 지도부로 인해 꺾였고,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저항했던 혁명 정신과는 달리 사람들은 기존의 집권당이 정치를 계속 이어가도록 표를 던졌다.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 자유를 원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들뢰즈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왜 자유가 아니라 예속을 원할까? 그것에 대한 답이 바로 『안티오이디푸스』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개인은 욕망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적이고 무의식 차원에서 ‘욕망’하도록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속당하면서도 예속인줄 모른다.
1972년 그 해 『안티오이디푸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68혁명의 정신을 잇는다며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어려운 책, 『안티오이디푸스』를 샀다. 알다시피 이 책의 저자는 전통적인 학자 들뢰즈와 혁명전사 가타리다. 공동 저자인 들뢰즈는 자신이 가타리라는 ‘번개’를 받아 적은 ‘피뢰침’이었을 뿐이라며 가타리가 이 책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말했다. 가타리가 어떤 영향을 끼쳤길래 들뢰즈는 이런 극찬을 했을까?
1.기계의 새로운 사용법
『안티오이디푸스』가 독특하면서도 독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계’라는 개념 때문이다. 책의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이 단어는 아주 익숙하지만 반면에 너무 낯설기도 하다. 기계라 하면 차갑고 매끈하거나 혹은 기름이 칠해진 투박한 무엇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기계’를 그렇게 바라보다간 한 줄도 읽어내려 갈 수가 없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기계’란 끊임없는 움직임 그 자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 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질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오이디푸스』, 23쪽)
기계는 특이하다. ‘입’은 ‘말하는 기계’이기도 하고 ‘먹는 기계’이기도 하며, 토하는 ‘항문기계’면서 ‘쾌락을 즐기는 기계’이기도 하다. 이것이 ‘기계’의 특징이다. 무엇과 만나느냐에 따라 작동법이 달라진다. ‘기계’는 그 순간 연결된 ‘다른 기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입안에 음식이 있으면 ‘먹는 기계’로 공기로 성대를 울리면 ‘말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입도, 눈도, 귀도 온 몸이 다 제각각 움직이는 ‘기계’이다. 온 몸 여기저기서 삐걱대며 돌아가는 ‘기계’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 ‘기계’들을 모아 놓은 것이 ‘나’임을 발견하게 된다. 뇌가 명령을 내리면 그것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신체를 가진 인간은 어느 새 잊혀 진다. ‘기계’는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도록 만드는 하나의 작동이다.
가타리는 ‘기계’라는 개념을 어떻게 갖고 왔을까? 가타리는 스스로 대학 졸업을 포기했지만 그의 전공은 약학이었다. 약학은 화학, 생물, 물리 등이 기본이다. 세포, 원자, 분자.. 이렇게 들어가다보면 어디까지가 생명체이고 어디가 무생물인지 헷갈린다. 분명 나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이 세포인데 세포의 구성을 파고 들어가면 분자와 전기 자극으로 구성된 인간을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외부’인가?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인간이 재채기를 하는 이유를 들었을 때였다. 몸속의 감기 바이러스가 증식을 위해 인간이 재채기하도록 조종한다고 했다. 바이러스에 의해 재채기를 당한다고? 내 몸은 내 것인가? 정신세계도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첫 눈에 반하는’ 이유가 면역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 허탈해진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면역체를 가진 사람’을 보면 내 몸은 ‘어서 저 사람을 만나!’서 건강한 후세를 낳으라고 종용한단다. 그래서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젠 하다하다 DNA의 조종까지 받다니! 이런!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평생 철학 공부만 해 오던 들뢰즈에게 이런 ‘기계’의 개념은 굉장했을 것이다. 가타리는 이미 「기계와 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가타리가 얼마나 매력적이었으면 들뢰즈는 초면에 당장 함께 책을 쓸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서두르는 들뢰즈에게 “천천히 하자”고 한 사람이 가타리였다. 흄, 스피노자. 니체 등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유를 넓히려면 들뢰즈에게도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으리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더 나아가 욕망마저도 ‘기계’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내공량’, ‘알’, ‘물질’ 등 과학적 단어들을 이용하여 철저하게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했다. ‘나’를 ‘알’로 만들기도 하고 내 몸 위에 좌표를 그리기도 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해체되고 없어져 버린다.
2. 두 발로 걷는 여행의 힘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로 통일된 인간을 해체했다. 인간이 자연의 ‘중심’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가타리는 ‘중심’에 대한 알러지가 있는 듯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가타리는 들뢰즈와는 달리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들뢰즈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이다.) 힘을 가진 부르주아에 압박받는 노동자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가타리의 놀라운 점은 중심이 노동자쪽으로 움직이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나아가 내 안에 중심이 생기는 것도 경계했다. 가타리는 공산당(PCI) 당원이 된 이후에도 당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이기보다는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다. 심지어 공산당(PCI) 모르게 프랑스공산당(PCF)에 복수(複數)로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58년에 통일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로 변모되자 탈당했다.
가타리가 중심에 맞설 수 있었던 힘은 여행이었다. 가타리의 첫 사회운동이 ‘유스호스텔 운동’임을 예사롭게 넘기지 말자. 유스호스텔 운동은 당시 노동자들이 유급휴가를 받게 되면서 젊은이들에게 여행을 많이 다니도록 하는 운동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가타리는 히치하이킹으로 유럽을 여행하는 ‘까라반느’라는 조직에서도 활동한다. 이 당시 젊은이들이 유럽전역을 히치하이킹으로 다니다니!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자면 필요한 것들을 최소화해야 한다. 만약 차를 타지 못하면 가방의 무게는 고스란히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운전자가 성격이 어떻든 어느 나라사람이든 차의 상태가 어떻든지 관계없이 운전자에게 나를 맞춰야만 한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 주변 상황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니 익숙한 내 것을 해체시킬 수밖에. 그렇게 ‘나’라는 중심을 떠나면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때로는 의미 없음을, 하찮게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아주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된다.
생각만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 삶은 단순해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고스란히 몸에 새겨진다. 여행의 힘은 여기에 있다. 단순함, 신체성. 이런 것은 힘이 세다. 결정이 쉬워지며 주변에 흔들림이 적다. 가타리의 활동에서 유난히 ‘독고다이’가 많은 것도 그런 것 때문이다. 당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라깡에 반기를 든 것도, 나중에 국가의 방송통제에 대항해서 ‘라디오 운동’을 벌이는 것도 가타리다. 보통은 권위나 힘에 눌리기 마련인데 가타리는 그것을 향해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 얼마나 대단한 ‘깡’인가!
가타리가 여행 이야기를 한다면 거기에 푹 빠져들 것 같다. 비록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들뢰즈라도 말이다. 가타리가 어떻게 히치하이킹을 했는지, 그때 만든 ‘이스파노 집단’이 낭테르 대학의 학생 시위에 어떻게 연관돼 있었는지, 그래서 68혁명까지 어떻게 번졌는지 귀를 쫑긋 세웠을 들뢰즈가 떠오른다. 어쩌면 조금 더 얘기해 달라며 집에 가려는 가타리를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가타리의 삶은 혁명 그 자체였고 힘이 있었다.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만남이후 사유의 방향을 확 틀어버렸다. 학문에 삶의 역동성을 녹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가타리는 들뢰즈에게 강력한 번개였다. 하지만 관계는 일방적으로 맺어지지 않는 법. 번개를 땅으로 안전하게 전달하려면 피뢰침이 필요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번개를 잡아다가 글자 하나하나 엮으며 정리하고 마무리 지은 사람이 들뢰즈였다.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말하고 주고받았으며 『안티오이디푸스』가 독자들에게 ‘기계’로 작동하도록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개인 저자들이 분량을 나눈 책이 아니라 들뢰즈‘와’ 가타리 ‘사이’라고 하는 제 3의 무엇이 만든 책이 바로 『안티오이디푸스』다. 그렇게 번개의 열기를 품은 이 책은 오히려 2019년 지금 더 ‘핫(hot)’한 철학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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