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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vs 연암] 죽음, 관계의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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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리 작성일15-07-11 22:35 조회5,8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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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관계의 변용


신명화(대중지성 3학년)

 

주역 중지곤 괘의 첫 번째 효사는 이상 견빙지(履霜 堅氷至)’이다. ‘서리를 밟으면 머지않아 얼음이 얼 것이다라는 의미다. 서리를 수차례 밟았으면서도 추운 겨울의 징후를 알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느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엄마는 죽음의 징후를 보이셨는데 한번도 엄마가 죽어가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늘 전과 다름없이 세상이 흘러 갈 것이라는 어리석음이 엄마의 죽음의 징후를 보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하게 한 것이다.


엄마는 2년 전부터 살이 자꾸 빠져서 방바닥에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다고 하셨다. 지병이던 천식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병원신세를 지셨다. ‘소화가 안 된다. 잠이 안 온다. 가슴이 아프다등 온갖 증상들을 이야기 하셨고 당신이 아픈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셔서 정밀검사까지 받으셨다. 검사결과 아무문제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는데, 엄마는 퇴원 후 일주일 만에 주무시다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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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연암을 읽는 중에 엄마의 죽음을 만났다. 생명 있는 모든 것에 찾아오는 죽음, 이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죽음을 만나면 우리는 왜 슬픔을 느끼는 것일까?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엄마의 죽음을 통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죽음이란 본질의 해체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크기나 길이가 있는 개체, 즉 모든 양태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일정 할 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외부적 조건이나 내부적 문제에 의하여 이 비율이 어긋났을 때 죽음이라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로 호흡할 때 우리는 살아있다.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고, 이 비율이 깨지면 산소가 부족해 살 수 없게 된다. 소화의 과정에서도 채우고 비우는 작용의 비율이 깨진다면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기 어렵게 된다. 음과 양의 일정한 비율 속에서만 삶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음이 과도하거나 양이 과도하게 되면 한 개체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개체만의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속에서 생명을 이뤄간다.

   

인간의 신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인간 신체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다.(에티카 4부 정리 39 증명)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갖게 되었을 때 나는 신체를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에티카 4부 정리 39 주석)

 

스피노자에게 있어 죽음은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같이 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 신체가 다른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본질이 변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신체가 늙고 병들었으므로 어느 한 순간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어긋나게 되었고 엄마의 신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존재의 본질이 변하였으므로 더는 살아있는 신체가 아니다. 새로운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가진 것으로 변용된 것이다. 존재의 소멸로 더는 엄마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신체의 변용으로 관계의 변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는 예전처럼 엄마에게 고민을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도토리묵 쑤는 법을 물어 볼 수 없게 되었다. 가슴 속으로 엄마를 떠올리며 그리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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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스피노자는 죽음이 아니더라도 신체의 변용으로 인해 다른 사람처럼 본성이 변하는 것도 죽음이라고 본다. 개인을 나타내주는 본성이 사라졌고 그 본성 속에서 만들어지던 관계들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죽음이 아니더라도 신체의 운동과 정지비율이 변하면 다른 사람처럼 된다고 한다.

 

슬픔과 코나투스의 발현

 

죽음이라는 사건은 기본적으로 슬픔이라는 정서를 지니게 된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만나게 되면 즉각적으로 신체에 근거를 둔 정서가 반응한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1차적 인식이 작동한다. 그래서 존재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에 슬픈 감정이 먼저 일어난다. 스피노자는 슬픔은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에티카 3부 정리 11)이며 슬픔의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기력하다는 게 아니라 원한, 증오, 분노, 질투의 힘 등 끊임없는 정서적 동요 상태에서 번뇌를 자가발전하며 살아간다는 것’(에티카 5부 정리 6) 이라고 했다.


장례기간 중에 실제로 슬픔 속에서 내 마음이 번뇌를 자가 발전하고 있었다. ‘왜 엄마가 죽었지? 의사가 잘못 진단해서 그런 것 아닐까? 아니, 아빠가 옆에서 엄마를 힘들게 해서 그런 거 아냐?’하는 마음이 생겼다. 외부의 어떤 원인으로 엄마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모든 걸 팽개치고 엄마 옆에서 임종이나 지켜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밤이 엄마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엄마 옆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서 생겨난 원망과 미움이, 자책과 한탄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아 괴로웠다.


타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정서에서는 새로운 의욕이 생겨나지 않고 인간의 활동능력은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이어졌으며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슬픔은 수동적 정서이며 존재의 역량을 떨어뜨린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변하기 시작했다. 스피노자가 정서란 이행하는 것이라 했듯이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나의 정서들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에티카 3부 정리 6)


이 노력(코나투스)이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을 때는 의지라고 불리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을 때는 충동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충동은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며,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에티카 3부 정리 9 주석)


 

엄마 영정 옆에서 밤을 새우면서 엄마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와 함께 삶을 살수 없는 건 슬픈 일이지만 엄마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과 고통스런 육체를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는 삶을 놓아버리는 것이 오히려 엄마에게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다. 어떤 충동처럼 확 다가와서 나를 감싼 생각이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엄마의 부고를 접하고 나서 24시간 내내 슬프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의 영정 앞에서 솟아나는 눈물은 그간 흘렸던 눈물과는 다른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눈물이었고 지극한 슬픔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잠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곡진한 울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그쳐졌다. 그러면 나는 말을 했고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 또는 욕구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conatus)가 나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견딜 수 있을 만큼 슬펐던 것이다.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수동적이기를 멈춘다.(에티카 5부 정리 3)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에티카 4부 정리 7)

 

 

모든 감정은 의지로 없애버릴 수 없다. 감정을 드러나지 않게 감추려고 애쓴다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드러나지 않게 억압된 채로 존재할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정서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른 종류의 정서로 바꿔주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적합한 인식에 이르게 하고, 존재의 활동 능력을 높여 줄 수 있는 기쁨과 같은 능동의 정서로 바꿔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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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자연의 한 부분이며, 죽음이란 생명 있는 모든 자연물의 필연적 귀결임을 받아들였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용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 몸 역시 매일 산소와 음식물을 받아들여 에너지로 변용시켜 삶을 유지 시켜간다. 그리고 이 신체는 다른 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한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항상 다른 가 생겨나는 것이다. 엄마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달리함으로 인해 존재의 변용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존재의 변용이 일어났으니 관계도 다르게 맺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나서 슬픔과 분노, 원망과 자책의 정서가 고마움, 감사함의 정서로 이행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 잃은 슬픔을 같이 느끼는 형제와 친척들이 있다는 것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또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와 준 친구들과 선배들, 멀리 있어 연락하지 않았어도 시간 내고 마음내서 찾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인 일이라는 생각과 장례식을 함께 해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감사함의 마음이 들면서 조금씩 슬픔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이런 정서들은 존재의 활동능력을 높여주는 능동적인 정서들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슬픔의 정서가 존재능력을 높여주는 기쁨의 정서로 변환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도 수동적이지도 않게 되었다.

 

수동의 정서를 능동의 정서로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정서란 이행하는 것이고, 수동적 정서를 능동적 정서로 변환시킴으로 존재의 활동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만나면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죽은 자가 슬픈 것일까? 산 자가 슬픈 것일까? 연암은 말한다. 죽은 자는 자기의 죽음을 알지 못하니 그 슬픔을 알지 못한다. 오직 죽음을 알고 느끼는 산 사람이 슬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슬픈 이유는 산 사람이 망자에게 못 다한 아쉬움이 있거나 망자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처지가 슬퍼진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대성통곡하는 사람이 고인이 살았을 때 제일 말썽부리던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망자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못해 주었을 때 이젠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에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는 망자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살아가는데 곤란한 일이 닥칠 것을 염려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슬픔은 산자의 몫이니, 내가 어떤 죽음을 만나도 마음에 남는 것이 없고 자기 생활에 슬픔이 없다면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슬픔은 자기 슬픔을 가지고 있다가 죽음을 만났을 때 슬퍼하는 것이다


 

아아, 비록 그렇지만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평일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자가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제 슬픔에 슬퍼하지 못하는 것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연암집 중권 유경집에 대한 애사. p255)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천지자연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생명체가 가진 필연적 귀결이다. 단지 시간과 방법이 다를 뿐이지 피해 갈 수는 없다. 이러한 자연의 필연적 인과법칙을 체득하고 있다면 슬픔의 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인과관계의 필연적 법칙을 따를 경우에만 적합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수동의 정서를 능동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연암은 이 힘을 이미 그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연암의 모든 제문, 묘지명, 애사 등 죽음에 관한 글은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망자의 삶을 간결하고 담담하게 정리하고 있다. 죽음을 천지자연의 이치로, 슬픔은 온전히 산 자의 몫으로 바라보니 죽음 앞에서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홍덕보 묘지명>을 보면 문객 중에 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친구의 부고를 중국에 사는 벗에게 전하게 한다. 자신과 망자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망자의 입장에서 관계 맺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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