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vs 연암] 수신(修身)과 낙천(樂天) > 횡단에세이

횡단에세이

홈 > 커뮤니티 > 횡단에세이

[스피노자 vs 연암] 수신(修身)과 낙천(樂天)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심원 작성일15-07-21 23:01 조회6,584회 댓글0건

본문

수신(修身)과 낙천(樂天) 

조용남 (대중지성 3학년)


1. 공부란 무엇인가? 

사회에서 부여해 주었던 지위와 역할이 다시 회수된 뒤 그간의 ‘매달림’에서 풀려나 생에 가장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적어도 세 가지 자유가 주어졌다. 책을 마음대로 보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하염없이 걸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그간 제대로 못 읽었던 책들을 꼼꼼히 읽으며,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공부가 이제 내 일상이 되었다.

1.png

『연암집』에 공부나 수신과 관련된 ‘도(道)’와 ‘사(士)’가 논의 되면서 그 앞에  ‘원(原)’자가 붙여 설명 되고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원도(原道)’는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가 도가(道家)나 불교의 도와 다른 까닭을 논변”한 글의 제목이라고 한다.(『연암집 상』211쪽) 『연암집』에 실린 ‘원도’에 대한 글에서는 이 ‘원(原)’자가 본바탕이나 본래, 일상를 의미하는 ‘아(雅)’자나 ‘소(素)’자와 같이 쓰이며, “본디”로 풀이 되어 쓰이고 있다.(『연암집 하』369-370쪽)  연암의 ‘원도(原道)’와 ‘원사(原士)’에 대한 생각을 읽어 보면, 도(道)가 인간의 본바탕과 멀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士)도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일상적이고 꾸준한 실천 없이는 뭔가를 제대로 이루기는 어렵다. 무엇을 하든 그런 노력 없이 ‘도(道)가 트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한편 우리는 도를 우리와 동떨어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며, 외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피노자도 『에티카』에서 희망과 공포를 주는 초월적인 신을 거부하면서, 인간이 신의 양태로서 자유에 이르는 윤리적 실천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도 그 길은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감정을 제어하고 억제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에티카』4부 서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되고 있다. 우리는 수동적 예속 상태라는 조건에 놓여 있다. 그것은 나와 사물들 간의 본성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외부 사물로부터 오는 자극에 우리의 신체는 늘 변용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우리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구체적 생활 속에서 우리가 감정을 좀 더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뾰쪽한 수가 없는 거 아닐까? 이런 노력이  곧 윤리적 실천이며, 이런 실천에 외부로서의 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두 사람 다 자기노력과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연암과 스피노자는 인간이 처해 있는 우주적 질서의 불가피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실천한다면 ‘낙천(樂天)’할 수 있고,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통해 지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전제 조건에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사물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인간이 속해 있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지성이나 이성적인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이 다르게 표현했지만, 어떻게 수신(修身)을 통해 낙천의 즐거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특히 연암이 이야기 하는 ‘본디’의 뜻을 되새기며, 하고 있는 공부의 의미와 방향을 새롭게 궁구해 보고자 한다. 

2. ‘본디’를 행하는 수신(修身)   

동양에서는 배움을 통해 성인이 되고 해탈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완성이 타인에 대한 의무나 신에 대한 복종보다 우선적이다. 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신을 통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사유를 우리의 일상에 적용 시켜 보면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우리가 고정된 ‘나’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매 순간 신체의 변용을 통해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것. 둘째, 인간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능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과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10916151136_imgsSbro.JPG

연암은 이런 수신의 방향과 관련하여 ‘본디 선비’론을 펴고 있다.  연암에게 선비란 “지위로 말하면 농‧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로, 천자도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은 선비”다. (『연암집 하』366-367쪽)  지위는 형편없지만, 자기 수신을 통해 덕을 쌓는다면 지위와 상관없는 왕공도 존경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선비다.  그러나 글을 읽는다고 모든 선비가 ‘본디 선비’는 아니다.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雅)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 하리요마는 능히 읽는 자는 적다. 아무리 효제충신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과 경륜의 술책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가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 같고 모습은 처녀 같으며, 1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연암집 하』369-370쪽)
어린애와 처녀와 같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아야 ‘본디 선비’다. 연암이 이야기 하는 ‘본디’의 뜻이 본래적이고 본바탕을 뜻하는 ‘아(雅)’자나, 평소‧평상을 뜻하는 ‘소(素)’자와 같은 의미라면(『연암집 하』369-370쪽 참조), 그것은 자연의 질서와 관련이 있고, 또 우리의 일상과 관련이 있다. 인간에게 자연은 본래적인 것이자 궁극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의 본성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자연에서 근원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은 자신의 본질을,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유한한 양태들의 변용을 통해 펼치고 있다. 스피노자식으로 해석하면 개개의 사물들은“신의 속성이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양태들”이며,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만물의 원인인 신의 능력을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에티카』1부 정리25, 계 및 정리 36, 증명)하고 있는 존재 들이다. 스피노자는 이 자연을 “자기 원인”(『에티카』1부 정의1)으로 존재하는 실체, 신으로 보고 있다. 보통 서구의 일신교에서 신(神)은 ‘나’라는 존재 밖에 있기에, 신앙을 망각하면 그것은 금방 ‘나’에게서 떠나버린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신(神)은 인간에게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에티카』1부 정리18)  내재적으로 존재하기에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몸을 통해 그 본성을 발현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생성 시켜주는 그런 실체라는 점에서 그것은 동양적 의미에서의 자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연암이 이야기 하는 “능히 본디를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연암은 어린이나 처녀에게서 이런 자연의 본성이 잘 드러난다고 보았다. 연암의 글들을 보면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의 원리로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다든지, 변화하는 자연 속 양태들의 소리나 빛깔이나 흥취 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는 글들이 많은데, 다 이 ‘본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본디’가 자연의 질서를 체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는 하나 ,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雅士)’는 도연명처럼 자연에 파묻혀 술을 많이 못 마신 것만을 슬퍼하는 세상에 초탈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일 년 내내 글을 읽으며 “능히 성인의 고심을 터득할 수 있는 자”로서 공부한 것을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자라고 말하고 있다. (『연암집 하』373,379쪽) 그는 세상을 근심하는 성인의 마음으로 세상과 부대끼며 살고 있지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도를 스스로 터득한 사람이다. 인간이 이 ‘본디’의 자세로 수신을 행할 때, 자연의 질서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를 닦고 있는 인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에티카』1부 정리15)는 스피노자의 말은 우리가 단순한 신의 피조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의 공통성을 통해 신의 변용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신이나 자연은 우리의 실제 일상적인 삶과 동떨어지게 존재 할 수 없다. 또 신이나 자연은 우리들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의 변용을 통해 신이나 자연의 속성을 발현하며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만약 늘 고정된 실존이라고 한다면 외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늘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고, 인생이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암이 이야기하는 ‘본디’를 행할 때, 우리는 자연이나 신의 속성을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몸속에 발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도(道) 또는 공통개념의 형성  

우리가 수신을 통해 얻고자 하는 능력은 무엇일까? 우리는 외부 양태들과 관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외부 양태들에 의해 변용되며, 늘 수동적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수동성과 삶의 경쟁으로 인한 슬픈 정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연암이 이야기 하듯이 도(道)를 우리 일상생활에서 구현해 나가는 것, 그리고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나와 사물들 간에 어떤 공통개념을 형성하여 더 이상 외부로부터 작용 받지 않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신체와 정신은 능동성으로 충만하게 되고, 모든 사물과의 관계에서 보다 강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좀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다.   
    
0011.jpg

연암은 도(道)를 사람이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도가 어렵지 않은 것은 “길을 나아갈 때 반드시 궁벽진 데를 버리고 험한 데를 피하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니는 데”를 가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옆길로 빠지는 것은 “대문을 나서기 전에 사심이 앞섰”기 때문이다.(『연암집 상』212쪽) 그러면서 연암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바를 아는 것이 길에 달려 있는지, 아니면 발에 달려 있는지를 묻고 있다. 
밟는 곳은 확고하나 발을 드는 곳은 의지할 데가 없으며, 발을 옯길 때는 비록 전진하나 멈출 때에는 가지 못하네…두발에 장차 한번은 허망한 셈이니, 진실로 알고 실제로 밟고 간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길을 갈 때 발 둘 데를 생각하여 걸음마다 안배 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몇 리 가지 못할 걸세. 그러므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성에 가장 근접한 것이긴 하네. 그러나 독실하기도 하고 소략하기도 하며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니,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은 아니지 (『연암집 상』213-215쪽)
연암의 입장에서 보면 밟고 가는 길과 따로 밟는 걸음이나 발을 생각할 수 없다. 연암에게는 가는 길과 길을 간다는 행위 자체가 구분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도에 이르는 문제는 실제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마다 다른 문제가 된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일상이나 우리의 신체와 동떨어져서 도를 생각 할 수 없다는, “분리 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는 <중용>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연암집 상』215쪽)  여기서 보듯이 도는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자신의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또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는 구체적 일상적 실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연암은 배우지 않고서도 능할 수 있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암에게는 하늘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도(道)와 기(氣)가 분리되지 않음으로 도는 우리 몸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도를 볼 수 있는가? 기가 아니면 이를 드러낼 길이 없네. 그러므로 기는 도의(道義)와 짝을 이루어서 길러야만 호연해지는 것이지. 사람에 대해 인(仁)을 합쳐서 말하면 그것이 도일 세. 하늘과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요, 도와 기가 서로 분리 되지 않음은 바로 이와 같네.…도를 구하자면 당연히 제 몸에서 만나게 될 터이지 (『연암집 상』213-215쪽
그러나 우리의 신체에는 대부분 자신의 이해관계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상(相)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사물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 할 수 없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우리 정신이 이런 “타당하지(적합하지) 못한 관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수동적”(『에티카』3부 정리1 계)이 되며, 따라서 우리의 신체적 능력은 저하되고 예속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데 있다. 신체가 인식 오류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신체라는 매개를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공통개념”(『에티카』2부 정리 40 주석2)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체가 다른 물체들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은 보다 많은 것을 타당하게 지각하는데 더욱 유능하다.”(『에티카』2부 정리 39,계연암도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나와 사물의 공통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나(我)의 처지에서 저 물(物)을 볼 것 같으면 나나 저나 고루 이 기를 받아서 하나도 허하거나 빌려온 것이 없으니 어찌 천리가 지극히 공평하지 아니한가. 물의 처지에서 나를 볼 것 같으면,나 역시 물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체로 삼고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나의 성을 지극히 발현하면, 물의 성을 지극히 발현할 수 있다.  (『연암집 상』220-221쪽)
연암이 이야기하는 ‘천리가 지극하게 공평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사물들과의 공통개념을 형성하여 적합하게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물의 처지에서 나를 보면, 나 역시 물과 하나’ 라는 관점 하에서 ‘나의 성을 지극히 발현’해야만 사물들과 공통개념의 형성이 가능하다. 공통개념은 본성의 일치, 즉 두 신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은 존재 양태들이 관계를 맺어 결합의 형태가 커질 때 형성된다. 두 신체에 상응하는 관계들이 서로 결합할 때 두 신체는 보다 우월한 능력을 갖는 전체를 형성한다. “모든 것에 공통적이며, 부분의 속에서도 전체의 속에서도 똑같이 존재하는 것은 타당하게 파악될 수밖에 없다”(『에티카』2부 정리 38)는 스피노자의 정리에 따르면 공통개념은 필연적으로 타당한(적합한) 관념들이다. 

4. 낙천(樂天) 또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연암과 스피노자 모두 하늘이나 신의 뜻을 인간이 알아차리고, 관계하는 사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움을 느낄 때의 기쁨이나 최고의 만족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연암은“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을 낙천(樂天)이라고 했는데, “만물 중에 생을 누리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은 없다. 천명을 즐거이 여기고 그 천명을 순순히 따르면 물(物)과 내(我)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명한 성”(『연암집 상』 219-233쪽) 이라고 했다.  연암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나 사물이 본성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것이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다만 나와 다른 사물을 구분 짓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서 인간중심주의가 생기고, 나의 입장에서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기중심주의가 생기면서 우리가 그 자연의 필연성을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스피노자도 연암의 낙천(樂天)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다. 앞서 봤듯이 우리가 자신의 정신과 신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지고 이성의 능력에 따라 공통개념의 폭을 넓혀갈 때,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물들의 본성이 일치하는 지점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인을 이해하는 능력은 증대되고, 만물이란 신의 능력의 표현이고 만물의 원인은 신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결국 “많은 것에 유능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감정에 거의 침범당하지 않”게 되며, “신체의 변용들을 지성의 질서에 따라 정리하고 연결하는 능력을, 따라서 신체의 모든 변용을 신의 관념과 관련시키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에티카』5부 정리 39 증명, 주석) 이런 인식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물의 활동능력을 고찰하다보면 최고의 정신적 만족이 생기는데, 이 기쁨은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수반하”게 되어, 이런 인식에서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생긴다.”(『에티카』5부 정리32 증명,
    
이런 낙천이나 지복의 경지는 “말똥구리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하여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연암집 하』51쪽) 그런 경지이다. 우리는 신 안에서 또는 천명아래서 각자 상황에 적합한 쓸모가 있을 뿐이다. 모든 양태는 하늘이나 신의 질서 안에서 어떤 차별도 없으며 자유롭다. 만물은 ‘좋고’ ‘나쁨’,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연암과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한 자연의 필연적 법칙에 따라 운명의 부침을 겪지 않을 수 없으나, 계속 외부 조건에 작용 받으며 살지 말고, 자연이나 신의 이치를 궁구하여 적합하고 참된 인식을 얻어 능동적으로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권하고 있다. 수동이 우리의 신체에 나타난 결과에 집착하여 외부로부터 힘의 작용을 ‘받는 것’이라면, 능동은 결과를 발생 시키는 원인에 대해 인식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그런 능동성을 수반하는 생의 기쁨은 신에 대한 의무의 이행이나 계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배움과 노력으로만 누릴 수 있다. 하늘 또는 자연의 뜻과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의 길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도(道)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평소에 일상에서 사물의 근본이나 바탕에 충실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도 일상에서 ‘본디’를 행하는 수신을 하고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완전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과정을 통해 현재 존재하는 나는 자신의 실존보다 더 큰 세계를 욕망할 수 있고, 지금과 다른 존재 방식을 자유로이 꿈꿀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성(生成)’ 그 자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thumImage.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