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vs 장자] 후회 없이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 횡단에세이

횡단에세이

홈 > 커뮤니티 > 횡단에세이

[들뢰즈 vs 장자] 후회 없이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얼음마녀 작성일15-10-13 15:08 조회5,508회 댓글0건

본문


 후회 없이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고은주


  

마흔 살이 되던 해 가을,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와중에 , 이러다 곧 죽겠구나싶었.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그 한 순간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게 실감났다. 그동안 잘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써 왔던 건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살다 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겨울, ‘죽어 버려야지하고 모질고 독한 결심을 했다가 차라리 그 마음으로 살겠다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그날 이후 내 삶의 모토는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가 남지 않게 잘 살자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남아 있는 삶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했고, 이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온 힘을 다해 왔다.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죽게 될 때 그동안 잘 살았다고 뿌듯함을 느낄 줄 알았는데, 그 결과는 내 예상과 완전히 어긋나버렸다. 여태껏 엉뚱한 방향으로 힘껏 달려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처럼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다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세 번째로 살아갈 기회를 얻고 나서야 무작정 내달리기를 겨우 멈출 수 있었던 거다.


20151008_133102.jpg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큰 시련이 사람을 단련시키는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공부를 해 나가다보니 남다른 경험 자체가 삶의 지혜로 곧장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걸려 넘어진 자리가 어디인지 살펴보고 거기서 몸을 일으켜 어디로 가야할 지 더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각성이 생겨난다. 이번 학기에는 장자안티 오이디푸스를 길잡이 삼아 지금까지의 를 돌아보고 후회 없이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자기 개발은 이제 그만


스무 살 이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다. 온갖 연수를 받으러 다녔고, 집단상담, 단합대회, 생일잔치, 뒤뜰야영, 협동학습, 학교 내 교사모임에 지역 모임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자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일들까지 추가되면서 시간이 항상 부족했다. 퇴근 시간을 넘기고 방광이 터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화장실에 처음 가는 일이 다반사. 하지만 억지로 참았다는 걸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매일 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할 일을 마치고 나서야 완전 방전상태로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렇게 온 몸의 기운을 모조리 써버리길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 몸이 버텨 주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20151008_134627.jpg


잘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던 나는 어째서 이렇게 살아왔던 걸까? 욕망에는 내 몸 자체가 만드는 원초적인 것도 있지만 우리를 둘러싼 사회체가 만들어 내는 것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는 인간이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성취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자기 개발을 지속해 나가는 주체들을 만들어낸다.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결합으로 정의되는 부르주아 내재장은 비길 데 없는 노예상태, 전례 없는 종속을 설립한다. 더 이상 밖에서 동물에게 짐을 지울 필요가 없으며, 동물 스스로 짐을 진다. ...인간은 사회기계의 노예이다. - 안티오이디푸스, 428p

 

자본주의 사회체에서 각 개인들은 스스로를 인적자본이자 투자의 대상으로 여긴다. 필요한 자원을 발굴하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듯이 자신을 관리한다. ‘더 많은 심신의 능력을 갖추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집단 환상에 빠져 자가발전(自家發電)하는 노예.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늘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어제의 나와 미래의 자신을 견주어 보면서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매번 출렁거리는 감정,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은 물론이고 자의식, 인정 욕망, 소유욕 등등 내 안에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충동과 그에 대한 억압들... 이것들이 사회체에 의해 어떻게 등록되고 이용되는지를 면밀히 살피지 않는다면 습속과 견문, 지식 같은 사회체가 만들어 놓은 논리에 사로잡히게 되고 만다.


결국 그간 내게 살아갈 힘이 되어준 강렬한 성취동기와 열의는 스스로를 불만족스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자란 부분을 계속해서 채워나가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향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하도록 만드는 자본주의적 재영토화에 걸려든 것이었다.


여태 나는 스무 살까지 내가 참 한심하게 살았다고만 생각해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별 불만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생사의 기로에서 이전과 다르게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것이 스스로를 더 지독한 노예상태로 옭아 매버렸다.


나를 둘러싼 사회체가 설정해 놓은 삶의 의미를 내면화해 버린 나는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 더 나은 인간이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내달려왔다. 다시 얻은 삶의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생명 자체를 마구잡이로 소진해 온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남아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을 괴롭히는 데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끝없는 변화 긍정하기

 

동의보감』 「내경편<양성금기(養성禁忌)>에서는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 욕심내어 탐하는 것, 일하거나 말하는 것, 웃거나 근심하는 것,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등등을 줄여나가라고 한다. 그래야 타고난 본성을 키우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퍼뜩 든 생각은 이건 살면서 발현해 나가야 할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압하면서 억지로 참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었다.


동의보감에서는 화기(火氣)를 그 주된 작용에 따라 군화와 상화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 화() 모두 움직임을 본성으로 한다. ()에 뿌리박은 화기라서 우리 몸의 수승화강을 책임지며 항상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움직임이 군화(君火)라면, 상화(相火)는 뿌리 없이 생겨나서 펼쳐지는 화기로 뭔가를 이루어내려는 의욕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이다. 자기 개발을 지속하는 주체들을 양산하면서 더 열심히 살아가라!’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거기에 발맞추어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상화(相火)의 작용이 항진되어 버린다.


물론 상화의 에너지,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욕망은 삶을 추동해 나가는 동력이다. 하지만 신명(神明: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되면 양기가 과도하게 불러일으켜진다. 지나친 양기는 몸속의 생명물질()을 다 태워 버린다. 그러면서 진액이 졸여져 담음(痰飮)이 되고, 그 상태에서 계속 몸과 마음을 혹사하면 담화(痰火)가 되어버린다. 족심열(足心熱)과 서병(暑病), 천식, 이명(耳鳴)과 신허요통 등등. 그동안 내가 앓아 왔던 다양한 병증들은 하나같이 치솟아 오르는 상화(相火)의 기운을 붙잡아야 한다는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어긋난 상태로 살아오기를 반복해오던 나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퓨즈가 나가 버리듯 쓰러지고 나서야 이게 아닌가 보다.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겨우 시작할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내가 살아온 모습이 어땠는지 돌이켜 보니 버리고 줄이라는 것이 강요된 금욕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다. 바깥으로 넘쳐 나는 상화의 불기운을 붙잡아야 욕망의 폭주를 멈추고 제대로 쓸 수 있는 법. 그러기 위해서는 무작정 뭔가를 더 얻고 채워나가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내야 할 지점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일상의 리듬을 조절해 나가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욕망을 옥죄는 금기가 아니라 생명을 지켜나가기에 맞춤한 출구다.


CO0aCfJU8AE44Jh.jpg

장자역시 양생과 양성, 생명()을 기르고 타고난 본성을 기르며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절름발이 왕태나 곱사등이 지리소, 형벌로 발이 잘린 신도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들은 모두 외형이 불완전하지만 내면의 덕을 갖춘 사람들이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섬기는 자는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으로 애락(哀樂)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며,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마음 편히 운명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을 최고의 덕이라 합니다. - 장자, <인간세>, 121p

 

덕이 충만하여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이들은 하나같이 현재를 긍정하며 살아간다. 불구로 태어났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경솔하게 처신하다 형벌로 발을 잃었을 때에도 잘못을 숨기거나 변명하려 하지 않고 그 대가를 담담하게 감당해낸다. 외부에서 닥쳐오는 빈곤과 부귀, 헐뜯음과 추켜세움,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까지도 모두 변화 자체에 맡겨 둔 채 그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 어떻게 하면 그런 덕을 갖출 수 있을까?


자기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으려면 천지자연의 무궁한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고 다시 그 변화에 따라 죽는다. 생성과 소멸, 시작과 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도()의 힘이 작용하기에 사람은 사람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쥐의 간이나 벌레의 팔뚝으로도 변하게 된다. 만물에 차별이 없다고 여기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입장에 설 때 생과 사를 넘나드는 끝없는 변화를 긍정할 수 있다.


그동안 생물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외부와 교환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삶도 일시적인 기의 모임일 뿐이고 언젠가 천지의 기운으로 흩어질 운명이라는 것도 분자운동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충분히 수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배워서 이해하는 것과 내 삶을 두고 생각하는 건 따로 놀고만 있었다. 그러니 삶을 좋다 하고 죽음을 싫다고 여기는 분별심을 떨치기 어려울 수밖에.


죽음을 애써 거부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때 삶과 죽음은 물론이고 늙음까지도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지.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편하게 하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대종사>,201p”라고 말하는 장자처럼 삶이 좋은 만큼 죽음 역시 좋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조절하면서 살아가느냐가 문제다.

20151008_134956.jpg

이제 앞으로 한 달 정도 지나면 나는 삼년 전부터 결심했던 대로 20년 동안 쉬지 않고 해오던 일을 그만 둘 예정이다. 그러면 일하고 돈 버는 데 쓰던 시간을 줄이고 내 몸을 돌보면서 천천히 하고 싶은 공부를 해 나갈 계획이다. ‘조금 벌어서 덜 쓰는 것에서부터 시간과 에너지를 다르게 배분하고 운용하는 것까지 지금까지와 다른 리듬으로 살아간다는 게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갈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모색을 해 나가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이제는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