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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장자] 장자, 기이한 욕망의 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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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5-10-07 15:56 조회3,9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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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 기이한 욕망의 탈주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박 성 옥 

 

화폐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욕망 


BC 4세기경 중국, 철기시대로 접어들어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상업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때는 각 지방의 제후들이 중원을 차지하려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였다. 욕망이 들끓던 이런 세상에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으니 장자다. 장자는 한 때 옻나무 밭을 지키는 칠원지기를 지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산림청 말단공무원쯤 되겠다. 그것도 아주 잠깐, 이윽고 장자는 자발적 백수가 된다. 얼굴이 누렇게 뜬 장자는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남루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공자나 초나라 왕 같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었다. 가까이 지냈던 친구 혜시는 위나라 재상이었다. 돈도 지위도 없는데 노는 물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급이라니 거 참 이상한 일이다. 장자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 두 개만 살펴보자. 


하루는 조상(曺商)이라는 사람이 장자를 찾아온다. 조상은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진왕에게 상으로 수레 백대를 받아 돌아온 사람이다. 아주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모양이다. 조상이 자랑을 늘어놓자 장자는 호통을 친다. 진왕은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뺀 자에게는 수레 한 대를 주고, 치질을 핥아서 고치는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준다더군. 그대도 그 치질을 고쳤는가? 더러우니 당장 꺼져 버리게(장자, 장자, 안동림역, 현암사, 2013, 765) 수레 100대면 치질을 20회나 입으로 핥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정도면 얼마나 더러운 정치적 행동을 했을지 안 봐도 뻔하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을 귀히 여기는 세상인데 장자는 부와 권세를 부러워하기는커녕 부끄럽게 여긴다  


또 하루는 초나라 위왕이 장자를 재상으로 초빙하려고 많은 예물을 보냈다. 장자는 그대는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사마천, 사기열전1, 김원중역, 민음사, 2012, 84)라며 재상자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우리 같으면 재상이 아니라 정규직 자리만 줘도 냉큼 받을 텐데 말이다.  


재물 보기를 하찮게 여기는 남자, 재상이 되기보다는 시궁창 속의 자유가 좋다는 이런 남자. 그의 욕망은 대체 어떤 것일까. 부인도 있는 한 집안의 가장이 재물, 권세, 명예, 지위에 대한 세속적 욕심이 하나도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장자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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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화폐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존재라는 건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삶의 척도는 화폐다. 화폐의 소유량으로 사회계층이 형성되고 갑을관계가 확정되며 권력의 서열이 정해진다. 끝없이 화폐를 증식하려는 욕망이 모여 자본주의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 그런 사회에서 화폐를 개똥같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는 비정상적인 또라이 취급을 할 것이다. 돈 못 버는 무능력자 내지는 세상의 가치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자라고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장자 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화폐를 많이 가진 자의 위력은 그것을 못 가진 사람들이 욕망할 때 만들어진다. 대다수의 사람이 어떤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많이 가진 자의 위력은 저절로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화폐의 그물을 빠져 나가는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바람처럼 잡히지 않는 욕망은 통제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런 욕망은 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전복적인 힘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자식으로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유화의 욕망은 인간의 본성인가  


개인들의 욕망이 달라지면 그 차이들은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사회를 설명했다. 그에게 사회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다. 들뢰즈는 사회를 욕망기계들이 만나는 몸이라는 의미로 사회체라고 표현했다. 사회체도 하나의 욕망기계다. 사회체는 개인들의 욕망에 따라 모습이 바뀐다. 사회체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욕망을 코드화하고 그 흐름을 잘 통제하는 일이다. 코드에 길들여지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코드를 벗어나려는 욕망도 있다. 모든 사회체는 탈주하려는 욕망을 붙들어서 다시 안정적으로 순화시킨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특이하게도 개인의 욕망들이 탈코드화되는 흐름 위에 세워졌다. 나의 눈길을 끈 대목은 이런 자본주의의 특이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원시영토사회나 절대군주국가, 봉건제와는 달리 화폐를 향한 개인의 욕망을 철저히 분산시킨다. 원시사회가 구성원들의 욕망적 생산을 토지 위에서 하나로 집결시켰다면, 현대 사회는 욕망을 철저히 사유화시키고 개인으로 분산시킨다.”(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역, 민음사, 2015,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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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를 향한 무한증식의 욕망을 풀어놓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개인의 욕망은 철저히 사적으로 분산되어 경쟁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만 소유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향해 달려간다. 사유화로 축적된 재산이 시장과 만나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라는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과 자유노동자라는 노동의 탈코드화된 흐름이 만나서 탄생한다.” (안티 오이디푸스, 70)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전유하고, 자유노동자는 노동력을 팔면서 상품을 생산해낸다. 현대사회는 철저히 사유화된 화폐경제의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다. 자본은 흐름에서 잉여가치를 뽑아낸다. 이제 자본은 돈이 돈을 낳는 기계가 되었다 


90년대에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서있던 소련 사회주의가 망했을 때 나는 의아했다. “함께 일해서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 서로 좋을 텐데 왜 망했지?” 이론상으로는 이상적인데 현실에서 생산을 관리하는 국가권력이 부패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똑 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는데 누가 열심히 일하겠느냐는 것이다. 내 것이 안 된다면 일할 의욕이 안 생기는 게 인간의 본성이므로 애초부터 공유에 대한 이념은 헛된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정녕 사유화의 욕망은 인간의 본성일까? 아니면 특정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욕망인가. 들뢰즈는 개인의 욕망은 무의식조차도 사회적인 산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를 소유하고 자기 가족에게만 상속하고 싶은 사유화의 욕망은 그런 사회적 기반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3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젊은 사회체이다. 사유화의 욕망과 경쟁심은 본래부터 인간의 DNA 속에 흐르는 본성이 아닐 수도 있다. 물질과 재화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현대에 와서 강화된 특성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 사유화의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 본성에 가장 충실하게 사는 자본주의는 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가 


자본주의는 욕망을 계속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다. 욕망이 정착되면 돈이 회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자본은 미세한 차이로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낸다. 욕망은 우리를 늘 결핍상태가 되도록 만들고 조종한다. 예컨대 비슷한 디자인의 옷이라도 압구정 며느리가 입는 브랜드는 수십 배의 고액으로 팔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욕망처럼 착각한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유행과 광고이미지를 원래부터 자신이 욕망하고 있던 것으로 혼동한다. 사회가 주입하는 욕망을 따라가느라 우리의 몸은 피곤하기만 하다. 기술발달로 더 편리해지고 생산의 효율성은 높아지는데도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 건강을 망친다. 건강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돈이 필요하다. 이런 악순환 위에서 자본의 잉여가치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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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파시즘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방식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내 맘대로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될 것 같은데 결코 자유롭지가 않다. 자본가는 마음대로 상품의 가격을 높이고 싶어도 시장의 제약을 받는다. 상품이 비싸면 안 팔린다. 노동자도 몸값을 높이고 싶지만 시장의 제약을 벗어날 수가 없다. 자본가가 이윤을 높이려고 임금을 낮추면 노동자의 구매력이 약화돼서 상품이 더 안 팔린다. 상품도 노동력도 화폐가치로 추상화된다. 시장을 조정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원하면서도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열렬히 요청한다. 기업들은 산업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정치권력과 유착한다. 노동자도 세금은 적게 내고 복지혜택은 많이 받길 원하며 국가에 의존하고 종속된다. 더 강력한 물가정책, 금리정책, 부동산정책으로 국가가 경기를 부양시켜주길 기대한다. 욕망들이 만들어 내는 국가는 가장 강력한 욕망기계가 된다.

 

국가, 가장 환상적인 탄압기계 역시도 욕망이며 욕망하는 주체요, 욕망의 대상이다. 국가 안에 감금된 자. 저 되돌아온 잔혹. (안티 오이디푸스, 377)

 

누가 잔혹한 국가를 욕망하는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 스스로 강력한 국가의 힘에 감금되기를 욕망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파시즘이다. 우리는 권력을 가지기를 욕망하면서 동시에 권력에 예속되기를 욕망한다. 관료조직이나 경찰기구 같은 자본주의의 부수적 장치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소시민이 된다. 이런 장치들은 생산기계를 통제하고 과잉자원을 흡수하면서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해낸다. 아무 쓸모도 없는 상품과 서비스를 끝도 없이 생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 쓸모없는 것들을 소비하면서 화폐의 굴레에 갇혀 점점 무력화된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계속 분화시키고 극으로 치닫게 한다. 욕망이 한 곳에 정착되면 자본의 회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멈출 수 없이 돈을 버는 자동기계가 되었다. 이것을 보고 들뢰즈는 더 이상 주인이 없고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기계의 노예이며, 스스로 짐을 진다고 했다.(안티 오이디푸스, 428)

 

스스로 노예가 되게 만드는 시스템. 이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정치권력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화폐라는 하나의 가치로 학교, 사회, 상품, 인간들을 줄을 세우는 폭력성도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경쟁사회를 비판하면서 나만은 승자가 되기를 선망한다. 재벌기업이 온갖 편법으로 대를 이어 가족경영을 하는 것을 질시하면서도 그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소원한다. 이게 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물신화시키는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승자의 윗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환상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그런 환상을 깬다. 정치에 대한 상식도 깬다. 그는 사람을 다스리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한다.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진다(장자, 224)면서 자연 그대로 두라고 한다. 인위적인 정치에 가치를 두지 않는 장자를 그 어떤 권력이 유혹할 수 있겠는가. 장자는 태평성대의 아이콘인 요, 순임금조차 냉정하게 비판한다. , 순 임금이 넓적다리의 살이 깎이고 정강이 털이 닳도록 애쓰고 다니며 세상 사람들을 돌보고, 자기의 건강을 해치며 예법제도를 만들었지만 상벌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혔다(장자, 283)


천하를 가장 잘 다스린 요, 순임금도 장자가 보기에는 쓸 데 없이 고생만 하고, 양생(養生)에 실패한 인물이다. 세상의 주류가치를 따라서 열심히 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서민은 목숨 걸고 이익을 따르고, 선비는 몸을 바쳐 명예를 따르며, 대부는 몸을 바쳐 가문을 지키고, 천자는 목숨 바쳐 천하를 지키지만 모두 본성을 해치고 자기 몸을 희생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장자』, 224쪽)고 장자는 경계한다.


장자적 욕망은 아주 간명하다. 자기 본성을 해치지 말고 몸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장자가 보기에 이익과 명예, 가문과 천하를 위해 애쓰는 욕망은 양생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에 충실한 삶은 양생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화폐에 대한 욕망을 추구할수록 양생은 거리가 멀어진다. 우리는 왜 양생과 반대가 되는 길을 걷는가. ‘안티 양생’이야말로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자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욕망의 탈주와 존재변신


화폐 대신 장자가 택한 양생의 길은 절대자유의 경지다. 장자는 나무그늘 아래 고요히 거니는 소요유()를 택한다. 소요유는 모든 걸 손 놓고 있는 무기력이 아니다. 오히려 거센 주류 질서의 흐름을 멈춰 세우는 힘이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군중들이 다 같이 속도를 늦추고 느릿느릿 걷는다면 그 도로는 전혀 다른 길이 되어 버린다. 장자의 자유는 기존 가치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는 색다른 욕망의 흐름이다. 주된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다. 이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존재변신이 필요하다. 소요유는 역설적으로 지독한 노력과 힘의 의지로 얻어진다.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물고기가 새가 되는 존재변신을 해야 한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이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오르기를 9만리, 그런 뒤에야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장자』, 27~28쪽)


존재변신은 엄청난 시련이다. 3천리 파도를 일으키려면 얼마나 많은 날개짓을 힘겹게 해야겠는가. 그것도 외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원해서 변신해야한다. 하늘 높이 올라 수만리 먼 곳으로 날아가는 대붕의 뜻을 미물들은 모른다. 국가에 예속되고, 화폐에 매여 사는 우리 같은 자본주의적 욕망기계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의 세계이다.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욕망을 따라가는 분열증 환자가 될 것인가, 전혀 다른 욕망을 꿈꾸는 돌파자가 될 것인가. 푸코는 자본주의의 돌파자가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완전히 새롭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의 적은 “대중들의 욕망을 동원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한 역사적 파시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있는 파시즘,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까지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안티 오이디푸스』, 7쪽)이라고 말한다. 무의식과 욕망 안에 흐르는 파시즘과 대결하지 않고는 화폐의 노예가 된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장자식 욕망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전복적인 힘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화폐로 환원하고, 철저히 사적으로 소유하고 가족 삼각형으로 계승하는 흐름을 벗어나는 위력적인 힘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분열증이며 탈영토화의 흐름이 아닐까. 화폐로부터의 자유는 전혀 다른 욕망의 돌파방식이 될 것이다. 욕망의 회로를 바꾸는 것은 곤에서 붕이 되는 것만큼 아득하지만 그 실천은 새털같이 가벼운 날개짓에서 시작된다. 모두가 함께 날개짓을 할 때 구만리 높이로 쌓이는 바람이 우리를 탈영토화 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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